대기업들, 여윳돈으로 금융시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입력 2014.06.19 08:33|수정 2014.06.19 08:33
    금리 낮은 은행서 벗어나 채권 등에 투자
    삼성전자, 4ㆍ5월 사이 2조원어치 사들여
    현대차는 자금운용 전문가 선발하기도
    • [06월18일 15:00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게재]

      기업들이 현금을 들고 은행 대신 금융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경기 회복에 대한 확신 부족과 신수종 사업 발굴 실패로 기업들은 곳간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 예전같으면 마음 편히 은행에 맡겼겠지만 여의치 않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했고, 은행의 자금운용도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대신 기업들이 직접 금융시장에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채권이나 파생결합증권 등 금융상품에 여윳돈을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수시출입금 관리도 증권사 랩(Wrap)이나 금전신탁, 자산운용사의 펀드 상품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보유 현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해 조금이라도 수익을 내자는 계산이다.

    •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현금을 쥐고 있는 삼성전자의 행보는 단연 금융시장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보수적인 현금관리로 유명한 삼성전자가 올해 들어 채권시장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직접 또는 계열 금융회사를 통해 우량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에 작게는 500억원, 많게는 3000억원대의 채권을 샀다. 지난 4월과 5월, 두 달간 삼성전자의 채권 매입액은 2조원에 육박한다는 게 채권시장의 추정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안정적인 자금운용 원칙에는 변화가 없지만, 여유자금을 은행에 맡기는 데 한계가 있어 은행 이외로 자금 운용처를 확대하고 분산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삼성전자가 관계사인 삼성자산운용과 맺은 자금운용 계약 규모만 연간 5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가 자금운용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은 최근 3년간 현금성 자산이 약 30조원 이상 증가한 이유도 있지만 은행들의 예금에 대한 태도 변화가 한 몫하고 있다. 저원가성 요구불예금도 많은 상황에서 이자를 더 줘야 하는 대기업 예금을 공격적으로 유치할 필요가 준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거액의 자금을 예금하겠다고 하자 한 시중은행이 손사래를 쳤다는 얘기는 금융시장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적극적인 자금운용을 모색하고 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해 전문운용역을 선발해 금융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주가연계증권(ELS) 투자를 검토하는 등 안정적이면서도 실세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주는 상품에 실험적인 투자에 나섰다. 현대차는 5월말 기준 HMC투자증권의 특정금전신탁(MMT)에 1조4100억원을 집행했다. 한 증권사의 금융상품영업 담당자는 "현대자동차는 올해 채권혼합형 펀드로 3000억원을 집행했으며 증권사 신탁과 랩(Wrap) 등을 통해 자금 운용을 다변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기업들의 은행 예금 이탈과 운용처 다변화는 금융위기가 진정된 2012년 이후부터 시작됐다. 영업실적이 좋은 기업은 물론이고 부진한 기업마저 자산과 부채 조정을 통해 확보한 현금을 비은행기관에 맡겼다. 단 몇 bp(0.01%포인트)라도 높은 금리를 받겠다는 의도였다. 대표적인 상품이 금전신탁이다.

      한국은행 자금순환동향에 따르면, 2012년 비금융법인(일반기업)의 금전신탁 규모는 전년보다 19조7000억원, 2013년에는 18조2000억원이나 늘었다. 올해 1분기에도 8조2700억 증가했다. 금전신탁으로 이동한 자금은 상당부분 장기저축성예금에서 빠져나왔다. 매년 15조원 내외로 늘었던 장기저축성예금 잔고는 2013년에는 5조원가량 감소했다.

      공동락 한화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1~2년간 흐름을 보면, 은행들이 예금을 받아 운용할 곳을 찾지 못하는 미스매칭이 발생하자 예금금리를 낮췄고, 반작용으로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채권 투자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국고채, 통화안정증권, 한국산업은행채권, 정책금융공사채권, 시중은행채권 등 주로 우량 회사채에 투자했다. 삼성전자가 사들인 채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 기업들은 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주식연계증권(ELS), 파생결합증권(DLS) 등으로 투자 상품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위안화예금을 기초자산으로 유동화한 기업어음(이하, 위안화 CP)은 최선호 투자대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년 만기 은행채 금리는 2.7~2.8%에 불과하지만 위안화 CP는 3.4%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증권사 관계자는 "삼성그룹 계열사 한 곳에서만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총 5000억원 규모의 위안화 CP를 사들였다"고 전했다.

      네이버는 공격적인 자금운용으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기관투자가들도 외면한 롯데건설의 상환전환우선주(RCPS) 발행에 100억원을 투자했고, 해외채권 펀드 등에도 수백억원의 자금을 집행했다.

      기업들의 직접 운용과 운용처 다변화, 투자 상품 확대 등으로 금융사간 기업 투자자금 확보 경쟁이 치열해졌고, 특히 먹거리가 줄어든 증권사에 기업 여윳돈 유치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기업들의 자금운용 규모가 커지면서 이를 유치하기 위해 수수료 할인 경쟁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자금운용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기업가 정신에 기초한 투자 대신 자산운용을 통한 초과 이익 창출에 더 적극적이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30대 그룹의 투자액은 전년 동기대비 9% 가량 늘어난 20조5000억원을 기록했지만 삼성그룹을 제외하면 투자 증가율은 -4%였다는 게 CEO스코어의 최근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