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합병 열쇠 쥔 국민연금 정체성은? 기관투자가 vs 국부기금
입력 2015.07.09 07:00|수정 2015.07.09 07:00
    [Invest Chosun]
    의결권 지침 따라가기겐 시장 상황 크게 바뀌어
    '수익률 극대화'냐 '국민경제 고려'냐 갈림길…삼성물산 투표가 시금석
    중장기적으로 기업지배구조 투명화에 무게 실을지도 결정해야
    • [07월08일 18:47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게재]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의  지배구조가 국민연금의 결정에 따라 뒤바뀔 상황에 처했다.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는 논리와 '반대'해야 한다는 논리가 혼재된 양상이다.

      2줄짜리 '의결권 행사지침' 이나 지난 2006년에 제도가 마련돼 현직교수들이 주로 참여해온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에만 기대기에는 시장상황과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지적이다. 재계를 대표하고 국가경제의 기반이 되는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좌우하기엔 해묵은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것이다.

      핵심은 국민연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에서 비롯된다. 투자수익률 극대화만을 추구해야 하는 재무적 투자자로 활동해야 하는지,  아니면 국민경제 전반을 고려해야 하는 정책성 국부기금으로서 성격을 더 내세울지 확정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경영권 보호장치가 제도적으로 미흡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에 힘을 실어줘야 할지, 아니면 공공연금으로서 기업지배구조 투명화를 통한 '코리아 리스크'(Korea Risk) 감소를 추구할지도 판단해야 한다.

      ◇ '투자수익 극대화' 관점만 보면 찬성 예상 높아

      삼성물산에 대한 삼성그룹 지분율은 KCC 포함이 20%에 머문다. 엘리엇매니지먼트 및 외국인 지분율은  33%를 넘는다. 국민연금은 주주명부 폐쇄일 기준 9.92%(의결권 기준 10.77%)의 삼성물산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단일 주주 중 지분율이 가장 크다. 국민연금이 누구의 손을 드느냐에 따라 합병 성사 여부가 갈리는 구조다.

      국민연금은 동시에 제일모직 지분도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 8일 공시를 통해 국민연금이 최초로 밝힌 제일모직 지분 보유량은 5.04%, 약 680만주다. 제일모직 상장 이후 지분을 매입했다면 대략 1조원 정도를 투자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이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할 것이라는 시각이 강했다. 수익률 극대화가 목표인 기관투자가로서 '투자수익 극대화'란 논리만 놓고 본다면 합병 찬성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번 합병이 무산된다면 확실한 그룹 지주회사의 자리를 놓치게 되는 제일모직은 주가가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의 제일모직 투자 금액이 삼성물산 투자 금액보다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제일모직 주가 하락시 국민연금 입장에선 수익률 하락이 불가피한 셈이다.

      삼성물산은 저평가돼있고 제일모직은 고평가돼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양쪽 기업 지분을 모두 보유한 국민연금 입장에선 합병 후 실익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가다.

      ◇ 의결권 자문기관 등 '반대' 논리 급부상…SK C&C 표결에서 '일관성' 사라져

      분위기가 바뀐 건 지난달 말 SK㈜와 SK C&C의 합병에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면서다.

      SK㈜와 SK C&C의 합병은 ▲두 거래 모두 오너 일가의 그룹 지배권 확보를 위한 거래 성격이 크다는 점 ▲합병비율의 공정성이 이슈가 됐다는 점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비슷한 거래로 꼽혔다. 양쪽 회사에 국민연금이 모두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같았다.

    • 국민연금은 "합병비율이 SK㈜에 불리하고 자사주 처분 시기가 주주가치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논리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도 대응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연금에 자문을 제공하는 의결권 자문기관들의 권고도 모두 '반대'였다. 국민연금은 국내에선 서스틴베스트와 기업지배구조연구원, 해외에선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에서 의결권 행사에 대한 자문을  받고 있다. 3곳은 모두 최근 합병비율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국민연금에 전달했다.

      국민연금으로선 이번 의결권 행사의 '원치 않은'(?) 파괴력 때문에 회피 논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때 활용해왔던 의결권 행사지침은 ▲사안별로 검토하되 주주가치의 훼손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반대한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경우 반대 또는 기권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지난 5년간 국민연금은 이 지침을 충실히 따라왔다. 주가가 주식매수청구 가격보다 낮을 경우 매수청구권 확보를 위해 기권했고, 사업적으로 시너지가 있다고 봤을 땐 찬성했다. 지난 2013년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 냉연 부문 분할합병에선 각 사별로 이점을 따져 현대제철엔 찬성표를, 현대하이스코엔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 사례만 놓고본다면 국민연금이 제일모직엔 찬성표를, 삼성물산엔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도 따져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달 SK㈜-SK C&C 주총에서 국민연금은 합병비율이 유리한 SK C&C에도 반대표를 던지며 '일관성'이 사라졌다.

      ◇ '합병 반대는 국부유출' 논란…경영권 방어 vs 투명성 강화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결국 돌아온 논점은 '국부유출 논란'이다. 이 점 때문에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할 거라고 예상이 주로 나온다.

      이 같은 논리는 '국민연금이 단순히 재무적 투자자가 아니라 국가경제에 대한 영향력을 감안할 정책적 기금'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이는 '헤지펀드들이 한국 경제를 책임져온 국내 핵심기업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소방수로서 역할을 다해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해외 헤지펀드가 국내 기업을 흔들었을 때 이에 국민연금이 동조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국민연금 입장에선 보수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지난 2012년 미국 비스테온이 한라공조 지분을 95% 이상 취득해 상장폐지시키려 하자 이를 반대해 무산시켰다. 당시 국민연금 지분율은 7%로 반대시 95% 이상 지분 취득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봐도 반대논리가 만만치 않다. 당장의 경영권 방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그저 '대증요법'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엘리엇의 공격 덕분에 삼성그룹은 '주주가치 제고'를 전면에 내세웠다. SK그룹이 소버린 사태를 겪은 이후 오히려 투명성이 강화되고 지배구조 안정화의 기틀을 잡았다는 역설도 남아 있다.

      대기업의 경쟁력 제고와 투명성 강화를 위한 '보약'으로 보자면 오히려 국민연금이 '오너를 위한 합병'이라는 이번 거래에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국민연금에 반대를 권유한 의결권 자문기관인 서스틴베스트는 지배구조 등 비재무성 척도에 따른 기업지속성을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기관이다.

      게다가 한국투자공사(KIC)가 엘리엇에 투자한 기관투자가로 나타나면서 "엘리엇의 이익과 국익이 상충된다"는 프레임도 흔들리게 됐다.

      KIC는 5년전 블라인드 형태로 엘리엇에 투자했다. 수익률 제고를 위한 헤지펀드 투자였고 외화자산 운용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설립된 국부펀드의 일상적인 투자였다. 최근 과다한 정책 주문을 받는 국민연금도 이처럼 순수 재무적 투자자로서 역할에만 신경쓰는게 맞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올 법한 상황이다.

      ◇ 국민연금, 이르면 이번주 중 의결권 행사 방향 결정

      현재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찬성·반대·기권의 세 가지다. 상법상 주총 안건 결의는 '찬성 지분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기권은 반대와 결과적으론 마찬가지다. 주식매수청구권도 주어진다. 반대와의  차이는 '직접 반대는 안했다'는 명분 정도라는 평가다.

      국민연금은 이르면 9일께 투자위원회를 열어 이 사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결론이 나지 않으면 민간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에 공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전문위원회를 거쳐 오는 17일로 예정된 주총이 임박한 시점에 결론을 내릴 것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다만 사안이 중차대함을 감안해 민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결정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여러가지를 참고해 내부적으로 검토하는 중"이라며 "의결권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할지 여부를 비롯해 아무것도 현재까지 결정된 사안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