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구조조정 20년 전 그대로…정부 컨트롤타워 부재도 심각
입력 2016.07.15 07:10|수정 2016.07.15 07:10
    산은·채권단 중심 구조조정 고착
    한국 산업의 역동성 제한시킨 꼴
    부처간 소통 없고, 책임 떠넘기기
    앞으로 더 심각…정치 리더십 필요
    • 1997년 외환위기는 그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대기업 구조조정의 시발점이 됐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는 조선·해운·철강 등 주력 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 중이다.

      외환위기 때 마련된 구조조정의 방식과 토대는 지금까지도 거의 변함 없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엄청난 대내외 환경변화를 감안하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권고로 금융감독위원회를 발족했다. 그 감독 하에 시중은행과 산업은행이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한 때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라갔던 대우그룹도 해체됐다. 문어발식의 확장 정책을 펼치던 재벌기업들도 이 때를 기점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산업은행이나 채권단이 구조조정 시장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놓쳤다. 산업은행의 경우 오히려 대기업 관련 대출 비중이 전체 여신의 70%까지 늘어나면서 존재감만 더 커졌다. 사실상 국내 구조조정의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자율협약, 워크아웃 등 이른바 채권단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이 완전히 '공식'이 됐다.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은 산업 이해도가 낮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유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치중되고 그 방법론은 처분, 매각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일선에서 경험했던 대기업 관계자의 전언이다.

      “물론 대기업들이 무리한 투자로 어려움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당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있었고 회사 측도 추가 자금지원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국은 수습하기에 급했고 일언반구에 거절했다. 결국 사업 상당부분을 쳐내야 했는데 그것들 중에 지금 잘된 것들이 많다”

      채권단이라고 항상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기업일수록 출자구조와 채권채무 관계가 복잡해서 정작 은행이 힘을 쓸 수 없는 구조도 많았다. 이런 사례에서는 기업 경영진 또는 오너들에게 경영 실패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반대로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이 경영권 유지 목적으로 악용되는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금융당국에 몸을 담았던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를 수습한 후 산은이 사모투자펀드(PEF) 등 민간에 자리를 비켜줬다면 시장을 통한 구조조정 여건이 마련될 수 있었다”며 “산은이 엑시트(EXIT) 못한 것이 결과론적으로 한국 산업의 역동성을 제한시킨 셈”이라고까지 말한다.

      따져보면 시장이 실패할 것을 우려해서 마련된 것이 정책금융이다. 하지만 최근 대우조선해양 사태는 결국 정책금융의 실패를 의미한다. 물론 산은만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무리다. 또 정책금융의 존립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구조조정 부문에서는 현재 모델은 실패했다.

      정책금융의 대변자인 산업은행의 위상이나 위치는 더욱 애매해졌다. 민영화가 추진된 이후부터 산은은 정부를 대변한다고 보기에도, 그렇다고 민간 채권단의 대표자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민간 기업에 스스로 사업 재편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라고 맡겨놓기도 쉽지 않다. 기존 사업을 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주력으로 바꾸려면 엄청난 위험 감수가 전제돼야 한다. 고용 문제 등으로 여론의 동향도 살펴야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민간 구조조정 성공 사례는 삼성그룹 정도 아니면 없다고 할 정도다.

      결국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정부와 각계 전문가, 그리고 실행 주체인 기업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향을 도출, 거기로 조금씩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장기 로드맵을 그려야 할 컨트롤타워가 생겨야 한다는 의미다.

      청와대,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과 구조조정의 관계부처는 많다. 하지만 20년 전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외환위기를 맞았던 정부는 그간의 경험에도 불구, 컨트롤타워는커녕 대화의 장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 오히려 과거 구조조정의 틀과 방식에만 얽매인 채 이를 고집하는 데만 역력했다. 외환위기를 가장 잘 극복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던 경험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됐다.

      현재 정부에서는 자기 영역을 둘러싼 부처간 갈등이 드러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없고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는, ‘책임 리스크 분산’만 이뤄지는 꼴이라는 내부의 자조 섞인 목소리나 나온다. 정치의 부재(不在)가 드러난 것이다.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정책금융기관들은 일찌감치 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마련해 시행해 왔다. 이사회 위에 감독이사회를 둠으로써 지배구조를 이원화했다. 감독이사회에는 관련부서 장관과 노조 대표들이 참여한다. 장관의 참여로 정부의 일원화된 목소리를, 노조 대표의 참여로 정당성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실현화하기엔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들이 지나치게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축적돼 온 이해관계의 구조적인 문제가 구조조정 진행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을 한 정부 관계자의 토로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없을뿐더러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없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얘기는 없고,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만 관심거리다. 구조조정과 정책금융 개편의 큰 그림은 그리지 않고 문제가 터지면 땜질로 임시처방만 내놓고 있다. 의식 자체는 60년대 경제개발 체제와 다를 바 없다”

      조선·해운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서막을 알린 것뿐이고 또 다른 산업 재편과 주요 대기업들의 구조조정 이슈가 줄줄이 남아 있다.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금융권 전반, 나아가 가계부담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대선을 1년 남짓 남긴 '선거의 계절'이 도래했다. 컨트롤타워 구축과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 부족 문제를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적지 않다. 최악의 경우 현재의 상황이 다음 정부까지 이어지면서 더 큰 고통과 부담을 수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예상을 피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