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 키울 골든타임도 놓치고 있다
입력 2016.09.19 07:00|수정 2016.09.20 10:43
    [Invest Column]
    • 현대상선을 통해 한진해운 사태를 해결했다고 금융당국과 산업은행이 밝혔는데, 구체적인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 움직임을 보면 사태 해결보다는 책임 추궁, 대주주 일가의 사재 출연을 이끌어 내는 데 더 집중하는 모양새다. 이러다가 사실상 한 곳 남은 현대상선을 키울 기회마저 잃고 있다는 지적이 더 크게 들린다.

      해외 선주들은 한진해운 사태로 '멘붕'에 빠졌다. 선주들은 '정말로 한국정부가 한진해운을 기업회생절차에 넣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달 말, 한진해운 기업회생절차가 임박했을 때 선박금융회사들이 발빠르게 연장에 동의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선주들의 '멘붕'은 우리에겐 한진해운 사태를 완화하고 우리나라 해운업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그나마 남은 기회다.

      이제 협상 테이블에 선주들과 마주 앉아 보면 그간 용선료 협상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태도를 보일 것이다.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한진해운은 파산 가능성이 높고, 살아난다고 해도 용선료를 비롯한 채권들은 상당 금액 삭감되고 상환 기간도 10년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선주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주들은 기업회생절차 상황보다 더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배를 빼서 옮길 준비도 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선주들에게 차선이다.

      익명을 요구한 해외 선주 관계자는 "기업회생절차 상황에서 한진해운으로부터 회수할 수 있는 채권 규모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현대상선으로 넘어갈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미 선주들은 한진해운에 대해 회생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선주들이 현대상선으로 넘어가면 한진해운에 비해 낡은 배를 운영하고 있는 현대상선은 신형·대형 컨테이너선을 확보하는 기회이자 영업권도 쥘 수 있다.

      무엇보다 선주들이 현대상선에 주목한 이유는 이제는 국영해운사가 됐기 때문이다. 현대상선 최대주주는 산업은행으로 지분율이 14.15%다. 산은의 대주주는 정부다. 선주들에게 국영 해운사는 비교적 안전한, 용선료를 떼일 가능성이 낮은 곳으로 인식된다.

      실제 2013년 시스팬(Seaspan)은 동북아시아 주요 조선사에 대만 양밍해운이 장기간 사용할 1만4000TEU급 선박 15대를 발주했다. 2013년은 컨테이너 시황이 최악일 때였다. 당시 17위 정도였던 양밍해운에 시스팬이 용선 계약을 한 배경은 다름 아닌 양밍해운이 국영 해운사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1대 주주인데, 설마 용선료를 지급하지 않겠냐'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국영 해운사로 출발한 양밍해운은 현재도 타이완 정부가 33.3%를 들고 있다.

      양밍해운은 이같은 용선계약을 바탕으로 현재 세계 10위 해운사로 발돋움했다. 시스팬은 양밍해운이 사용할 배 가운데 5척을 대만 조선소인 CSBC에 맡겼다. 선박 수주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 시스팬은 대만 조선사에 5억5000만달러 규모의 발주로 대만 정부에 눈도장도 확실히 찍었다.

      결과적으로 양밍 용선프로젝트는 선주-해운사-조선소가 상생할 수 있는 사례였고, 양밍이 국영 해운사였기에 가능했다. 같은 사례를 현대상선, 나아가서는 국내 조선업에도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앞서 해외 선주 관계자는 "한진해운에 배를 빌려준 대부분의 선주들이 다른 해운사를 찾고 있지만 컨테이너 운임 하락을 비롯한 계약 조건 협상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물론 이 같은 방안이 실행되려면 현대상선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이 문제는 채권단 지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해운업이 기간산업이란 점에서 보면 채권단이 추가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진해운 협상 과정에서 일부 선주들은 한진그룹과 채권단의 지원을 전제로 한 한진해운에 자본 투자 의향을 밝혔다고 한다. 대상을 바꿔 현대상선으로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시스팬이나 조디악 같은 셈이 밝은 선주들은 어쩌면 이 같은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시스팬이나 조디악이 움직인다면 해운 맹주인 2M도 함부로 대하긴 어렵다는 게 글로벌 해운업계의 평가다. 다른 관계자는 "양해각서(MOU)체결 수준인 현대상선의 2M 얼라이언스 가입도 빠르게 진전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해운업계에선 2013년 시스팬 사례는 현재 상황을 보면 '이상적인 안'이라고 지적했다. 한진해운 사태에서 금융당국과 채권단 등은 사태 해결보다는 책임 전가·회피에 더 골몰하고 있어 주도적으로 선주들과 협상에 나설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가 자국 해운사를 지원할 때 우리 정부는 외면했고, 한진해운 사태가 터질 것에 대비해 대책하나 세우지 않았다"며 "정부에 대안을 제시해도 주도적으로 나섰다가 실패할 경우 지게 될 책임을 더 무서워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산은이나 정부는 한진해운 사태가 진정되면 국내 대기업 수출입 물량이 현대상선으로 넘어오길 기대하는 감나무 아래 누워있는 곰 같다"며 "이러다가 작은 현대상선 한 곳 남거나, 작은 현대상선과 더 작은 한진해운만 남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고 장기화  우려만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