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PBR 매몰된 국내 기관탓 적용 어려워
'수요예측 생략가능' 공모가 산정 제도 도입 추진
내년 중 일부 공모주 적용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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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적자지만, 기술력을 인정받아 매출이 오르고 있는 IT벤처 A사가 있다. A사는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이지만 공모가 산정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자본이 적고, 순이익은 물론 영업이익도 나지 않아 시장에 통용되는 방식으로는 시장 가격을 산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A사는 3년 후 이익을 예측한 후, 여기에 주가순이익비율(PER)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공모가를 구했다.
이르면 내년부터 A사 같은 기업은 주가매출액비율(PSR)을 활용해 IPO를 진행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가 IPO 관련 규제 점검에 착수하면서다. 이르면 9월 중 새 가이드라인이 나온다.
PSR은 매출의 성장세로 기업가치를 가늠하는 기법으로, IT벤처나 바이오 등 성장기업의 가치측정에 적합하다. 1950년대 미국에서 주창됐으며 피셔인베스트먼트같은 전문 운용사가 PSR 척도를 통해 큰 수익을 내기도 했다. 2014년 중국 알리바바가 뉴욕증시에 상장할 때 PSR을 활용하며 국내 일반 투자자들에게도 존재감이 알려졌다.
A사 같은 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공모가의 기반이 되는 3년 후 이익 규모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회계법인을 통해 공정한 방법으로 산정하지만, 이는 결국 회계적인 기법으로 책상 앞에서 계산한 숫자다. 기업의 현재 가치를 '추정치에 적당한 할인율을 적용'해 구하는 것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도 A사가 PER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수요예측 과정에서의 보수적인 공모가 산정 구조 때문이다. 국내 기관들은 대부분 상장 과정에서 주가순이익비율(PER), 주가순자산비율(PBR), 기업가치 대비 상각 전 이익(EV/EBITDA)만 척도로 활용한다.
공모주를 대부분 단기 차익거래(Arbitrage) 관점에서 접근하는 국내 기관들은 대중적인 가격 척도로 거래의 유불리만 따지지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성은 거의 주목하지 않는 까닭이다. 특히 코스닥 중소형 기업같은 경우엔 이런 경향이 더 강하다.
이는 그간 고성장·저수익 기업들이 증시 입성을 고민하는 장애물이 되어 왔다.
금융위는 성장기업의 경우 공모가 산정을 대표주관사 책임 하에 자율화하되, 수요예측 절차 없이도 공모 청약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가이드라인을 잡고 있다.
지금도 PSR 적용이 규정상 가능은 하지만 가격제시권을 가진 기관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수요예측 생략 가능' 규정은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일부 대형증권사는 PSR 적용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금융위원회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성장 후 주가가 급등하는 성공사례 한두 건만 나온다면 PSR도 차츰 증시에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EV/EBITDA 역시 2011년까지만 해도 '공모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회사와 주관사의 꼼수'라는 지적을 받았다. 2010년 상장한 현대HCN의 주가가 급락하자 EV/EBITDA 척도에 대한 기관들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지금은 EV/EBITDA가 일반적인 척도가 됐다. 2014년 제일모직이 이 척도로 상장했고, 상장 후 주가가 급등했다. 상장이 무산됐지만 호텔롯데 역시 사업부별 가치를 EV/EBITDA로 계산한 뒤 유가증권 가치를 더하는 '썸 오브 파츠(sum of parts)' 방식을 활용했다.
물론 밸류에이션에 PSR를 적용하려는 주관사는 시장조성 부담을 안아야 할 가능성이 크다. 수요예측을 생략하는 등 새 규정을 따라 상장하는 기업에 투자자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시장조성이란 상장 후 일정기간 주가가 정해진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약속한 가격에 주관사가 주식을 사주어하는 제도다.
한 증권사 IPO 담당자는 "알리바바 등 해외 성장기업 상장을 지켜보며 국내에도 PSR같은 새로운 척도를 들여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실무자들이 꽤 있다"며 "시장조성 부담은 있겠지만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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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6년 09월 11일 09: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