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도...'보신주의'와 '생색내기' 급급한 산업은행
입력 2016.11.02 07:00|수정 2016.11.03 07:57
    [Invest Column] 한진해운·대우조선 구조조정, 주변인에 그치며 역할 희석
    ‘혁신안’에 정체성 고민은 없고 ‘방만’ 이미지 회피성 공약만
    대우조선 지원안도 정부 발표 그대로 답습한 수준에 그쳐
    신성장 지원보다 산업 구조조정 급하지만 정부 역량·의지 의문
    “産銀, 혼란할 시기일수록 큰 그림 그려 이끌어가는 역할 중요”
    • 지난 달 31일. KDB혁신위원회가 기자들을 불러모아 ‘산업은행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혁신방안엔  '임직원의 출자회사 재취업 금지', '인력 및 조직축소', '임원 보수삭감' 등 지극히 당연하고도 이미 지켜졌어야 할 기초적인 내용이 담기는데 그쳤다. 성과에 치중해 대기업 여신이 편중됐다는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은 담겼지만 그래서 앞으로 어떤 성과를 추구하겠다는 '미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향후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큰 밑그림, 비전은 전무한 채 기존에 내놓았던 '보여주기식' 혁신안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쳤다.

      산업은행이 정말 인사혁신을 원했다면 회장도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적용 대상에 포함시켜야했지만 이는 또 빠졌다. 결국 최순실 게이트로 혼란하고 어수선한 정국에서 산업은행장과 임원들이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는 있습니다"를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대응이라는 평가가 나올만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인 1일 이동걸 산업은행장이 직접 참여한 대우조선해양 기자 간담회도 마찬가지였다.

      전일 정부가 발표한 알맹이 하나 없는 '조선ㆍ해운구조조정 방안'을 거의 그대로 재탕하면서 "대우조선에 대한 큰 틀이 완성되는 시점에 구체적인 부분을 국민에게 보고하는 게 순서"라며 생색내기에 급급했다. 정작 그 보고는 "대우조선에 돈을 좀 더 넣어주겠다"라는 미봉책을 알리는데 그쳤다. "왜 대우조선만 다시 살리느냐"는 당연한 질문엔 뻔한 설명이 돌아왔다. 낙하산 인사 행장의 보신주의가 그대로 드러났다.

      산업은행 내부직원들도 이런 흐릿한 방향성과 임기응변식 대응에 답답해한다. 노조 역시 혁신안이 ‘관치 책임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런 순간에도 산업은행의 정체성과 존립근거, 그리고 역할론이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중후장대 산업을 뒷받침하고 구조조정을 견인했던 기존의 역할은 옅어졌다. 앞으로 산업은행이 어떤 길을 가겠다는 영역을 설정하는 데는 혼선을 빚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시국에 정부가 산업은행에 어떤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간 산업은행은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할론의 수정을 경험했다. 이명박 정부는 산업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며 정책금융공사를 신설했다. 그러다가 박근혜 정부는 민영화를 백지화하고 통합 산업은행을 출범시켰다. 이렇다 보니 민영화를 감안해 전략적 투자 형태로 사들였던 KDB생명 매각이 순탄하게 진행될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정책금융기관으로 다시 회귀한 산업은행이 국가적 구조조정 국면에서 제 역할을 다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선·해운 등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산업에서 실패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정부가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는 최근에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진해운 사태에 대한 처리마저 '순수성'을 의심받을 정도다.  ‘자구노력이 있어야 금융지원을 한다’ 정부 원칙에 충실히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 원칙 자체가 진실이었는지 도마 위에 오르는 상황이다. 당장 혈세 수천억원을 아끼며 명분을 지키는 사이 1위 국적선사와 수십년간 공들인 해운 물류망은 와해됐다.

      이 판국에 정부는 또 뒤늦게  선박 투자회사 설립 등 6조5000억원 규모의 해운업 지원방안을 뒤늦게 내놨다. 산업은행의 고집스런 명분 지키기는 또 다시 무색하게 됐다.

      따져보면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에 대해서도 매번 주변인이었다.

      전임 홍기택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4조2000억원 지원은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결정됐다고 밝혔다 파문이 일기도 했다. 수장으로서 기관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지만, 산업은행이 결국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인상만 남겼다. 이번 지원방안도 결국 정부가 승인하고 산업은행이 따라가는 대우조선해양의 '생명 연장'을 위한 미봉책이란 평가가 많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산업은행이 스스로 나서 중심을 잡고 정부에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했다. 그간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 그리고 정부당국의 힘이 무색해진 현재 스스로가 생각하는 큰 그림과 존재의 당위성을 제시해야 했다. 지금 스스로의 존립가치와 미래를 증빙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정부의 입김에 매번 휘둘린다'라는 비판을 벗어날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이 기회조차 놓치고 있다. 해야 할 당위성을 찾기 어려운 간담회로 스스로의 가치를 더 떨어뜨리는 모습이다.

      전 산업은행 임원은 “지금처럼 나라가 혼란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상황일수록 산업은행이 나서서 큰 그림을 그리고 정부와 협의하는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며 “일시적인 대응보다는 산업 구조조정 등 본질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산업은행이 사실상 유일한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중요 의사 결정을 해보고 정부와 맞서 대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을 리더로 뽑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산업은행은 일련의 사태로 의욕이 꺾이고 움츠러들어 있는 상황이다. 구조조정부문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에선 나서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억울한 부분도 잘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산업은행의 역할을 대신할 정책금융기관은 없다. 당장 뭇매를 맞더라도 흔들림 없이 수십년간 쌓아온 경험과 시각을 풀어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부와도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 보여주기와 몸사리기를 하며 미적대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