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릴 5년'에 후진적 경제구조 민낯…신뢰와 기회 모두 잃었다
입력 2016.11.14 07:00|수정 2016.11.14 07:00
    [Invest Column] ‘청와대 게이트’로 후진적 경제구조 드러나
    대기업들, 21세기에도 개발주의 시대 답습
    외국인투자자 ‘선진화’ 요구 더 거세질 듯

    사실상 국정공백…정부發 사업 추진 동력 잃어
    4차 산업혁명커녕 기존 산업 구조조정 손도 못 대
    지금이라도 시장 각 주체들 소통해서 미래 준비해야
    • 대통령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여파가 이제 경제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대다수가 관련 재단에 자금을 출연했다. 어떤 그룹은 자의로 내놨고, 또 다른 그룹들은 추가 자금을 내 놓으라는 압박을 받았다. ‘정경유착’이라는 20세기 개발주의 시대 잔재가 유효했다.

      문제는 단순히 대통령과 최측근의 이권 확보에 그치는 것이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조차 정부와 비합리적인 창구를 가동하며 기업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로써 국내 기업들의 국제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다.

      반면 미래를 위해 진작에 이뤄졌어야 할 산업 구조조정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경쟁국들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이를 위한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정권 교체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남았고 이 기간은 사실상 진공 상태가 불가피하다. 박근혜 정부 5년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뛰어넘는 불황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삼성, SK, 롯데…정경유착 후진적 경제구조 드러나

      최순실 국정개입 논란은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경제의 후진적인 구조를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냈다.

      이번 게이트에 관련된 기업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도덕적 약점을 지닌 그룹이 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받았다. SK그룹과 롯데그룹이 대표적이다. SK는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이 구속돼 있었고, 롯데는 신동주-신동빈 형제의 경영권을 둘러 싼 다툼이 불거졌다. 이들 그룹은 최순실씨로부터 추가 자금 요구 압박을 받았다.

      실세의 눈 밖에 나면 이에 응당하는 조치도 이뤄졌다. CJ그룹에 대해선 오너 경영진에 대한 퇴진 압박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인했지만 발표 당시부터 의혹이 컸던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 무산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가 신빙성을 얻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평창올림픽준비위원회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한진해운 파산과 연관 지어지고 있다.

      민영화한 공기업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포스코와 KT 역시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좋은 ‘먹잇감’이 됐다는 표현이 더 맞다. 정권 교체마다 부침을 겪고, 정권의 입김이 여전히 강하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게다가 문화, 스포츠를 중심으로 게이트가 번졌다. 대규모 장치산업이나 변화 속도가 빠른 IT산업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져도 접근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여러모로 얽히고 설킨 CJ그룹은 이후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산업 첨병 역할을 맡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굴지의 글로벌 기업인 삼성조차 정부와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경제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라며 “결국 한국 정부와 기업에 대한 국제 신뢰도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투자은행(IB) 관계자는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M&A 무산처럼 자본시장 딜(Deal)이 정치적 이슈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며 “이렇게 되면 박근혜 정권 동안 이뤄진 M&A, 특히 당국의 입김에 들어갈 수 있는 삼성, 롯데, 한화그룹 간의 M&A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사실상 국정공백…산업 구조조정 손 놓나 우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대우건설, 우리은행, 현대시멘트 등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매각 작업에 착수했다. 경제 수장이 사실상 공백 상태인데다가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 이후 각 관계부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냐는 의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결국 시늉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평가다.

      더 문제인 것은 한시가 급한 산업 구조조정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운업과 조선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는 있다지만 경쟁력 방안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정무적 판단을 다음 정권으로 미뤄야 한다는 얘기조차 나오고 있어 자칫 내년까지 구체적 방안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구조조정 부문 관계자는 “선진국들은 구조조정과 관련한 법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오랜 기간 공을 들였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워크아웃과 법정관리 간의 유기적인 관계 설정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런 구조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회사까지 파산하고 만다”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정치 게이트 때문에 구조조정을 미뤄야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정부 당국자들의 핑계에 불과하다”며 “산업 구조조정에는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는 연속성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과감하게 진행해야 하고 각계 각층은 제 할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의 저성장 기조와 생산성 하락으로 신성장 동력이 필요한 가운데 주요 선진국들이 산업경쟁력 강화 전략을 추진하면서 ‘4차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있다. ‘노동의 종말’ 혹은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논의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산업과 그 구조조정은 여전히 노동 중심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다 보니 미래를 준비할 여력도 없다.

      지금이라도 신경써야 한다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치권의 다툼, 그 사이 책임 회피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관련 부처들로 인해 앞으로 1년4개월은 허송세월 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정부의 5년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능가할 침체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 승계 작업 진행 중인 재계, 도덕적 능력까지 요구 목소리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기업들이 스스로 생존하기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국가와 기업이 손을 맞잡는 것이 선진국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각계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정부와 기업, 소비자 등 경제 주체들이 터놓고 소통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국정 공백이 발생했지만, 산업 부처를 중심으로 경제 주체들이 미래를 고민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러는 와중에도 기업들은 ‘각자도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멈춰버린 정부만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통을 하자고 한 것이 언제든 '정경유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사건에 관련된 삼성 등 재벌 기업들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확실하다. 오히려 이번을 계기로 재벌들이 개발주의 시대의 산물과 작별을 해야만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국내 재계는 창업주, 2세들에 이어 3~4세 경영을 맞거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같은 기간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재계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전자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상징적이다. 성장성에 한계를 맞은 국내 대기업들에 더이상의 기다림 대신 '당장의 이윤을 내놓아라', 그리고 '오너가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최순실 게이트는 국내 재벌들에게 오너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선 도덕성도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권 실세의 이권 취득을 위해 기업이 보유한 현금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을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라고 이해할 투자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사건 이후 삼성전자 등 국내 간판기업들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급등했다. 국내 기업들의 대외 신인도가 떨어졌다는 얘기다. 이번 기회에 재벌들이 '정경유착'이라는 꼬리표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훌륭한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