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지금부터 '지난 4년'에 대한 재평가 시작
입력 2016.11.17 07:00|수정 2016.11.18 14:12
    경제관료 공석…금융개혁 정책 ‘스톱’
    미국發 변수로 실물시장 여파 우려
    검찰서 정치 게이트 관련 기업 조사

    산업 체질개선·구조조정 손도 못 대
    정경유착 민낯…대외적 신뢰도 추락
    기업들 국내 활동 한계 봉착…해외로
    • 연이어 발생한 메가톤급 '악재'로 한국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정부 시스템은 사실상 멈춰 섰고, 정책과 규제는 정당성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상실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국발(發) '자국 우선주의'라는 한파도 기다리고 있다.

      금융시장 주체들은 여전히 관치금융 체제를 졸업하지 못했다.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전근대적 지배구조와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모두 '미래'보다 '보신(補身)’에 여념이 없었다.

      같은 이유로 향후 1년은 ‘미래’ 밑그림 그리기보다 ‘과거’ 청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현 정권 4년간 있었던 수많은 딜(Deal)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과에 따라 국정 공백에 맞먹는 경영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국내외 불확실성은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위기 대응능력이 사상 최악이라는 점은 금융시장을 뒤흔들 아킬레스 건이 됐다. 당장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의혹들이 점점 사실화하면서 그간 경제를 이끌겠다고 나섰던 관료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국회의 동의 없이 국면 전환카드로 경제 수장 교체가 이뤄졌고 그 결과 경제부총리와 금융위원장 자리는 사실상 공석이 됐다. 이들이 재임 기간 추진해온 금융개혁 정책들도 방향성이 모호해졌다. 정부도, 의회도 '입법' 자체를 추진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경제 관료들의 실력과 시장 장악력이 10여년 전보다도 한 참 후퇴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남겨진 현안은 만만치 않은 것들뿐이다. 국제회계기준(IFRS4) 2단계에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보험사 회계규제 도입이 연말로 다가왔다. 초대형 투자은행(IB) 지원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도 준비 중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을 위한 은행법 개정안, 한국형 종합자산운용그룹을 위한 인가제도 개선안, 한국거래소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선안도 모두 지속 추진 여부를 알 수 없게 됐다.

      금융시장 종사자들은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금융은 결국 규제산업인데 컨트롤타워는 없고 불확실성은 커졌다. 정국의 추이를 보며 내부 관리에 치중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하면서 외생변수까지 추가됐다. 트럼프 당선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의 핵심은 불확실성이다. 당장 트럼프 당선 이후 12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인상할 것인가를 두고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저성장을 감안한 국내 기준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도 당분간 언급이 어려워졌다. 한국은행은 결국 5개월째 기준금리 동결 카드만 내놨다. 불확실성에 정치적 혼란이 겹쳐 국내 금융기관들의 신용도가 부정적 영향을 받는 상황도 우려된다.

      국정 공백과 미국의 변화는 부동산 시장 같은 실물시장으로까지 여파를 미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초기 경제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가 가계 부채 증가를 불러오자 정부는 투기 수요 억제로 정책 방향을 틀고 있지만, 이제는 전반적인 투자자들의 심리까지 자극시키는 꼴이 됐다.

      금융시스템이 마비가 된 상황에서 또 다른 경제주체인 기업들은 '내일'을 기약하기보다 '어제'를 변명하기에 바빠졌다.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리고 있는데 국정 공백에 일조했다는 점도 부각되고 있다.

      검찰이 대통령 비선 실세가 설립한 재단에 자금을 댄 국내 53개 기업에 대한 전수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내년도 사업 계획을 짜고 있어야 할 시기에 검찰 수사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7개 그룹의 총수들 역시 수사 대상이 됐다. 사실상 업무 마비 상태다.

      얼핏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재계도 이권을 취했다는 정황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경제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삼성그룹은 이번 게이트의 최대 수혜자라는 지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삼성은 박근혜 정권 동안 이재용 부회장의 주도로 지배구조 강화와 사업 구조조정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처리했다. 삼성이 다각도로 연루되면서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의 상장,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롯데 및 한화로의 계열사 매각,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상장 등을 곱씹어 봐야 한다는 정치권과 금융시장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련의 작업들은 결국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 작업 일환이고 이를 국민연금,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가 방관 또는 도와줬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굴지의 글로벌 기업인 삼성조차 정부와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며 "한국 경제가 여전히 정경유착의 개발시대 후진적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민낯을 보여준 셈”이라고 토로했다.

      삼성은 이제 시작일뿐이다. 재계 전반으로 재평가 될 사안들은 산적해 있다. 공정위의 SK텔레콤-CJ헬로비전 M&A 불허 결정과 중간지주사 도입 추진 등에 대해 관련업계에선 이해는 되지만 혜택을 받는 그룹이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시내면세점 사업자 선정은 다시 시끄러워질 수 있다. 애초에 경험이 없는 두산, 한화 등이 사업자가 되면서 말들이 많았다. 12월 재선정 발표가 있는데 롯데, SK가 이름을 올리고 있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공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이미경 부회장 등 CJ그룹 경영진에 대한 사퇴 압박과 CJ의 문화사업 첨병 역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올림픽조직위원장 사퇴와 한진해운 파산 등 특정 그룹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도 재점검이 불가피하다. 주인 없는 회사인 KT와 포스코는 또다시 정치권 비리에 휘말리며 민영화의 ‘아름답지 못한 전철(前轍)’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기업의 신뢰도는 떨어졌다. 삼성전자 등 국내 간판기업들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급등했다. 정경유착이 끊이지 않는 한국식 오너 경영의 약점이 발견되면서 3~4세 경영에 돌입했거나 맞을 준비를 하는 국내 재계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추라는 외국인 주주들의 거센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그나마 국내 먹거리를 도맡아주던 정보통신(IT), 자동차, 석유화학 등 국내 수출 주력산업들은 미국의 보호 무역주의에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마저 높아졌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어야 할 주요 산업들의 '체질개선'과 '구조조정'은 물 건너 간 상황이다.

      해운업과 조선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는 있다지만 정부의 경쟁력 방안에는 사실상 알맹이가 없다는 지적이다. 조선업에선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이 스스로 자구안을 이행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에 대해선 추가로 대규모 자금 투입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책임 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뿐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통령 측근 실세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의혹이 불거진 해운업 구조조정에선 당장 한진해운의 미주노선 매각에 대한 전략적 방향성도 검토를 못하는 실정이다. 철강, 석유화학, 건설 등 여타 구조조정 대상 산업들은 언급조차 안되고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여타 선진국들은 각국 정부가 나서 기업 M&A와 공급량 조절을 통해 산업 구조조정을 이미 진행하고 있다. 더 나아가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한 '4차 산업혁명'도 준비하고 있다. 여전히 노동 중심적인 산업 패러다임에 갇힌 한국 경제와 선진국들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각계 전문가들은 연속성을 지녀야 하는 산업 구조조정이 정치 게이트로 인해서 미뤄져선 안 된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정무적 판단은 다음 정권으로 미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들이 나온다. 결국 정치권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투고, 관련 부처는 실권을 잃은 현 정권 하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허송세월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난제를 만난 국내 재계는 미래 먹거리를 찾을 기회는커녕 당장 1년 뒤가 보이지 않을 상황에 처했다. 근본적으로는 정경유착에 얼룩진 오너가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이끌 자격이 있냐는 여론에 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