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만 찾는 '쏠림현상' 두드러져...투자 활기 잃었다
입력 2016.12.23 07:00|수정 2016.12.23 07:00
    대기업, 승계에 집중...자문사 일감 줄어
    100조원 달했던 채권시장, 올해 '80조원'
    바이오 기업 덕에 주식시장은 반짝 성장
    부채 부담 느낀 금융회사들 증자로 선회
    • 올 한해 국내 자본시장(Capital Market)을 규정 짓는 키워드는 '탈(脫)자문사', '자본확대' 그리고 '쏠림현상' 등으로 요약된다. 대기업들은 대규모 자금조달이 필요한 만큼 큰 설비투자나 M&A에 나서는 대신, 계열사 및 사업부 재정비 혹은 오너가 승계나 지배구조 개선에만 집중했다. 이로 인해 자금조달을 도와주거나 컨설팅과 자문을 제공하면서 일거리를 얻는 은행이나 증권사, 자문사들의 전통적인 일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대신 경제 생동감 확보를 위해 뒷받침 되어야 할 한계기업 구조조정은 정부의 헛발질 정책과 무능으로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에 국정농단과 탄핵정국으로 하반기 자본시장은 거의 멈춰서다시피했다.

      그나마 주목을 받은 바이오-제약 부문의 신성장 기업들로 인해 주식 관련 시장이 반짝 성장세를 보였으나 향후 추세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로 꼽힌다. 그 와중에 '안전하게 운영하라'는 취지로 확대되는 증권사ㆍ보험사ㆍ은행들에 대한 글로벌 수준의 자본규제로 인해 국내 금융회사들은 앞다퉈 자본확충 방안을 찾는데 급급해야 했다.

      전통적인 주식(ECM)-채권(DCM)-인수합병(M&A) 부문에서 체감 냉기가 가장 심했던 곳은 회사채 시장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의 주요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맡았지만 이제 위상 자체가 크게 떨어졌다. 100조원에 달했던 국내 채권시장이 올해는 80조원으로 줄었다. 비금융기업들이 발행하는 일반 회사채 규모만 2011년 57조원에서 올해 23조2500억원대로 발행량이 급감했다.

      결국 경기 침체와 경쟁력 약화, 그리고 미래에 대한 대비 대신 '몸사리기'에 치중한 기업들의 현황이 원인으로 풀이된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그룹의 회사채 발행은 5년 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었다. 사업 구조조정에 따른 매각 및 합병으로 발행 계열사 수가 줄기도 했고, 회사채 시장 단골이었던 중후장대(重厚長大) 계열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조선과 건설은 그룹의 재무건전성의 발목을 잡으면서 시장의 외면을 받았고, 업황 개선 효과를 본 정유·화학사들은 유입 현금으로 차입금을 상환하는 순상환 기조로 바뀌었다. 사업 확장보다 재무건전성 개선이 더 중요해지면서다. 채권을 ‘찍기’만 하면 팔리던 시대는 끝났다.

      반면 불황의 장기화 가능성으로 투자자들의 눈높이는 한 층 높아졌다. 대기업 계열사라고, 신용등급이 높다고 무조건 발행을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꾸준한 현금흐름을 낼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야 투자 대상이 됐다. 대내외 시장 환경이 악화하고 있어 이런 투자자들의 보수화 기조는 이어질 기세다. 비우량기업들은 높아진 자금조달 문턱에 당장 내년 차입금 상환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상대적으로 주식 시장은 나름 풍성한 한 해를 보냈다. 바이오 등 신성장 산업 기업들의 상장(IPO) 및 자금조달이 늘었고, 구조조정 기업들의 자본확충 수요도 커진 덕분이다. 사모 거래 포함 주식 시장을 통한 국내 기업 총 자금 조달 규모는 2011년 29조8000억원에서 올해 54조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유상증자와 전환사채(CB) 발행이 급증했다. 올해 유상증자 총 발행 규모는 41조7800억원으로 2011년(20조3300억원) 대비 무려 두 배 이상 커졌다. 삼성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현대상선, 한화투자증권 등 굵직한 대기업 계열사 거래가 시장을 이끌었다.

      또 BNK금융지주 등 규제를 피하기 위해 자본을 늘려야 하는 금융회사들의 증자도 잇따랐다. 회사채 시장의 단골고객이던 이들은 늘어나는 부채에 부담을 느끼며 자본성 자금 조달로 방향을 선회했다.

      반면 주식연계증권(ELB) 시장은 공모·신주인수권부사채(BW) 위주에서 사모·전환사채(CB) 위주로 완전히 반전했다. 2011년 2조9000억원 규모로 발행됐던 BW는 올해 4500억원 규모로 명맥만 간신히 유지했다. 같은 기간 1조8000억원 수준이던 CB 발행 시장은 4조9700억원으로 커졌다. 2013년 분리형 BW 발행 금지 규제가 분수령이었다. 이는 올해 주식 시장 공모 거래를 통해 증권사들이 벌어들인 수수료 규모가 2011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총 수수료 규모는 1902억여원으로 2011년의 두 배에 달했다.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도 완화되며 인수금액 대비 평균 수수료율도 1.5%로 상승 추세다.

      내년에도 롯데그룹과 게임·바이오 기업, 보험사 등 주식 시장을 이용하려는 수요가 꾸준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 증권사는 관련 인력을 보강하며 시장 확대에 대비하고 있다.

      새 먹거리를 찾거나 비핵심사업을 매각하려는 M&A시장은 '파는 곳만 팔고, 사는 곳만 사는' 시장으로 변모해갔다. 올 한해 대기업들은 삼성, CJ, 한화 등을 제외하고는 자산매각이나 기업쇼핑에 나서는 곳이 드물었다. 이재용 부회장 시대를 대비한 삼성그룹만 '뭉텅이'로 사업부나 계열사를 매각하면서 미래를 위해 10조원에 달하는 M&A는 거침없이 단행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그간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외국계 증권사(IB)나 회계법인, 법무법인의 활동 공간은 그 어느때보다도 축소됐다. "시장도, 업황도, 경쟁사 현황도 IB나 회계법인보다 기업이 더 잘 아는데 굳이 자문사를 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을 내기 어려워졌다.

      이 같은 현상들은 올해, 그리고 내년까지 투자은행(IB) 업계의 먹거리를 줄일 전망이다. 일례로 회사채 5조원 이상 주관 증권사가 2011년 8개사에서 2016년 3개사로 줄었다. 상위 3사의 실적 비중은 이제 50%에 육박한다. 수요예측 결과가 중요해지면서 투자자 확보에 보다 유리한 대형사 위주의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동시에 그 먹거리가 몇몇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시장은 커졌지만 '찾는 증권사만 찾는' 양극화는 심해졌다. 주관 금액 기준 상위 2개사의 점유율은 45.6%로 2011년 37.7%를 크게 웃돌았다. 주식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 실패가 평판 리스크로 직결되는 상황에서 자본력과 트랙레코드를 갖춘 대형사를 찾는 일이 잦아진 까닭이다. M&A시장에서도 대형 IB가운데느 ㄴ상위권 3개사 정도 이외에는 점점 더 활동공간을 찾아내기 쉽지 않아졌다.

      결국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한국 자본시장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라는 암울한 평이 적지 않다. 이런 단점을 그나마 기업과 자본시장 참가자들의 '생동감'과 '역동성'으로 극복하면서 동력을 발굴했는데 이를 상실하면서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다는 것. 매년 새해에 대한 자본시장 전망은 암울했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드리운 안개가 짙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