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적 사업재편'에 달린 IT기업 생존…일본이 주는 교훈
입력 2017.03.15 07:00|수정 2017.03.15 09:46
    "몰락 겪고서야 구조조정 나서"
    도시바·샤프 '대표 선수'들의 퇴장…대체하는 장비·소재 업체들
    소프트뱅크의 이례적 ARM인수…'방향성' 중요도 인식한 일본 기업들
    • 도시바가 존폐 위기에 놓이면서 일본 IT산업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일본이 주도해 온 반도체·디스플레이·가전 등 IT·전자 사업에서 일본 대표 기업들의 존재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쟁력을 모두 잃고 나서야 성장 방향을 모색한 ‘뒤늦은 구조조정 결단’을 일본 IT기업의 몰락 원인으로 꼽는다. 중국과의 산업 내 위태로운 경합을 펼치고 있는 국내 IT기업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고 있다.

      도시바는 최근 미국 원전 자회사가 우리 돈 7조원 규모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룹 해체 위기에 놓였다. 지난 2015년 회계부정 사태를 겪으며 조 단위 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 또다시 예상하지 못한 손실이다. 일본 고위 관료는 현지 언론에 “도시바는 이제 엘리베이터 회사로 남아야 한다”고 언급하는 등 국가 차원의 인위적인 지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지난해 대만 홍하이의 샤프 인수에 이어 국가대표 기업의 ‘퇴장’을 이어지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몰락은 200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의 약진에서 시작됐다. 특히 한국과 점유율 경쟁이 치열해진 가전, TV, 스마트폰 등 범용·완성품 사업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여기에 더해 2010년 이후로 중국 업체들이 천문학적인 자본을 바탕으로 부상하면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오히려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 업체들이 매물로 나오면서 중국 업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지난 2011년 일본 산요의 세탁기·냉장고 등 가전 사업은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에 매각됐고, 도시바도 2015년 가전 사업부를 중국 업체 메이더에 넘겼다. TV사업도 철수에 나서고 있다. 샤프·파나소닉·도시바·소니와 같은 주요 생산업체들도 지난 2015년 이후 해외 설비 매각, 시장 철수 등 몸집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낸드 부문 기술력 및 특허를 보유한 도시바 반도체 매각에도 중국 자본의 참여가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다만 악화한 경쟁환경 속에서도 일본 업체들 간의 체감 차이는 있다. "독보적 기술력을 통해 한·중 기업을 따돌리겠다"는 기존 전략으로 대응한 샤프와 도시바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뒤늦게나마 한국·중국 기업과 겹치는 영역을 정리하고 사업재편에 나선 소니, 파나소닉, 히타치는 최악의 위기를 피해 회복 국면을 맞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주력 사업과 함께 성장 전략 발굴을 병행하는 게 중요했지만 실패한 일본 기업은 이에 서툴렀다"며 "중국 업체의 진입으로 LCD 공급과잉이 예고되며 경쟁사들이 OLED 등 미래 투자에 나설 때에도 "LCD 다음은 LCD"라며 LCD 이후를 준비하지 않아 몰락한 샤프처럼, 과거 성공의 연장선상에서 미래 전략을 추진하다보니 사업재편 성과가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 세계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부품, 장비 분야로 사업재편을 마친 업체들이 과거 일본 IT기업들의 영광을 대신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IT·전자사업 시가총액 선두권에 오른 '키엔스(KEYENCE)'가 대표적이다. 각 공장 제조라인의 정상 가동을 체크하는 센서를 독점 개발하는 회사로, 지난 2015년에는 영업이익률 50%를 넘겼다. 반도체 후공정 몰딩 장비사인 토와(TOWA)도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한 회사로, 삼성전자도 주력 고객으로 삼고 있다. 무라타제작소·TDK 등은 경쟁이 치열한 스마트폰, 전자부품사업 대신 일찌감치 자동차 전장 분야로 영역을 확장해 산업을 이끌고 있다.

      일본 장비·소재사가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을 보인 사례로 캐논의 OLED 증착장비 자회사 도키(TOKKI)가 언급되기도 한다. 지난해 삼성디스플레이가 도키의 증착장비 전체 물량을 모두 선구매하면서, 모바일 OLED에 신규 진입하려는 LG디스플레이를 견제한 사례도 언급된다. LG디스플레이는 당시 도키의 증착장비를 구하지 못해 OLED 양산 계획에 타격을 입었다.

      정희석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토와·무라타공업소 등 일부 소재·장비 업체들은 자신들의 세계 1위 영역을 일찌감치 발굴해 업황과 관계없이 꾸준히 수익을 내고 있다보니 국내 기업에 ‘교훈’이 될 수 있다”라며 “다만 소니·히타치·캐논 등은 한국·중국과 경합하던 완성 사업에서 이미 완전히 경쟁력을 잃고, 뒤늦게나마 대체될 수 없는 사업에서만 수익을 얻고 있어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일본 소프트뱅크의 활발한 M&A 및 지분투자 움직임은 또 다른 시사점을 준다. 일본 IT기업들이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산업 판도변화를 읽고 방향성을 선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깨달았다는 평가다.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약 35조원을 들여 ARM을 인수해 시장에 충격을 줬다. ARM은 저전력 기반 반도체 설계 및 지적재산권(IP) 분야에서 9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는 사물인터넷(IoT) 분야에선 전력 소모를 줄이는게 핵심인데, 이를 위해선 ARM의 기술력이 필수적이다. 즉 단 한 번의 거래로 산업의 판도변화를 꿰뚫게 됐다는 분석이다. 최근 26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도시바 설비 인수에 나선 SK하이닉스와는 결이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한 IT업계 전문가는 “ARM의 수주현황 등 데이터를 통해 소프트뱅크는 IoT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다른 기업이 어떻게 투자하고 사업을 키우려는지 가장 정확하게 먼저 관찰할 수 있다”라며 “이처럼 ARM 통해 산업 방향을 읽은 후 펀드에 있는 자금을 활용해 꼭 필요한 기업들을 선점해서 재투자해 추가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