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컨트롤타워' 해체…'비즈니스 유닛' 새 바람
입력 2017.03.16 07:00|수정 2017.03.17 11:23
    '신속·과감 결정 차질' 우려 불구
    전문 경영인에 일임이 큰 흐름
    • 국내 재계가 '컨트롤 타워 해체'라는 큰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다. 글로벌 경쟁 격화로 하루 뒤의 경영 환경조차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기존 컨트롤타워의 역할은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에 대대적인 오너들의 세대 교체가 이뤄지면서 이들의 경영능력에 대한 검증 작업은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

      이에 국내 상위 그룹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룹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크게 축소시키는 대신, 개별 사업부에 힘을 싣고 있다. 전문 경영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함으로써 급변하는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내부 경쟁력도 강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자의든 또는 타의든 비즈니스 유닛(Business Unit) 중심으로의 재편은 재계 트렌드가 될 전망이다.

      삼성그룹은 미래전략실(이하 미전실)을 해체하면서 60년 가까이 이어 온 그룹 중심의 경영방식을 포기하기로 했다. 개별 계열사들의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이 이뤄지는 각자도생이 시작된 것이다. 자의는 아니었다. 삼성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으로, 미전실은 이를 관장한 비선 조직으로 낙인 찍히면서 정경유착의 고리를 근절한다는 강력한 대의 명분이 필요했다. 롯데그룹도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정책본부를 그 역할을 크게 축소한 경영전략실로 바꿨다. 대신 유통, 화학, 식품, 호텔·서비스 네 개의 BU 체제를 구축했다. 롯데의 이번 조직 개편 역시 이번 국정농단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그룹 컨트롤타워의 폐쇄 또는 비중 축소를 두고 당장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 대규모 투자 등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이 차질을 빚을 것이란 전망이 그것이다. 그룹 차원의 지원 가능성도 약화하면서 비주력 계열사들의 생존력도 떨어질 것이라는 염려도 커졌다.

      하지만 SK그룹을 보면 기우라는 평가다. SK는 2012년 11월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사외이사 등이 참여해 그룹의 새로운 운영방식인 ‘따로 또 같이 3.0’을 공식 도입했다. 계열사들이 평소 각사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하다가 그룹 차원에서 협의할 사안이 있을 때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 위원회에 참여해 협업하는 게 핵심이다. 이 덕분에 SK그룹은 최태원 회장 부재 상황을 무난히 넘겼고, 현 시점에서는 재계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꼽힌다.

      사업부의 독립성 강화는 일부 그룹만의 얘기는 아니다. 현대중공업, 오리온, 매일유업 등 지주사 전환을 선언하며 투자 부문과 사업 부문으로 나누는 등 사업부들을 나눴다. 네이버, 카카오 등 IT 업계에서도 사업부 분리 후 상장 추진 등 개별 사업부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른바 SK 스타일의 비즈니스유닛(Business Unit) 바람이 대세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사업부문 구조조정과 그룹 지배구조 변환의 연계 과정에서 진행되는 딜(Deal)들이 상당 수인데 개별 사업부의 생존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총수 또는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분담하거나 축소하고 개별 사업부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기업들은 과거와 달리 주력 계열사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소수가 그룹 계열사들의 모든 사안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더 이상 아니다. 시장 환경이 급속하게 바뀌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도 심화한 상황에서는 개별 기업의 신속한 전략적 판단이 더 중요해졌다.

      오너들의 교체가 일제히 이뤄지면서 그들의 성향이 바뀌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익숙한 젊은 오너 일가가 개별 기업의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기는, 이른바 전문 오너의 등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재계 관계자는 “총수 또는 컨트롤타워의 역할은 대규모 투자, 구조조정, 대형 M&A 등 그룹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 협의하거나 결정을 하고, 신사업 찾기에 집중을 하는 대신 개별 사업부는 전문 경영인들이 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며 “오너 경영인이 다뤄야 할 범위는 줄지만, 그만큼 존재감은 더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SK의 수펙스가 좋은 사례로 꼽힌다.

      개별 계열사들의 분위기도 개선될 수 있다. 그동안 그룹 컨트롤타워에서 톱다운 방식으로 이뤄지던 회전문식 인사가 사라질 수 있다. 대신 사내 또는 업계의 산업 전문 경영인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개별산업 전문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오너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다. CEO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커지는 만큼 책임감도 크다. 실적에 대한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CEO간 경쟁구도가 전개되면서 그룹 전체의 경쟁력도 개선될 수 있다는 평가다. 동시에 구조조정 과정에서 키울 사업은 키우고 버릴 사업은 버리는 것도 수월해진다.

      다른 관계자는 “오너 입장에선 그동안 모든 결정에 대한 평가를 혼자 짊어져야 했지만,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할 수도 있고 동시에 ‘실축’에 대한 일정 부분의 책임을 CEO들에게 전가하는 것도 가능해진다”고 전했다.

      이런 흐름에 맞춰 덩치가 큰 개별 계열사 내 사업부 분할이 활발해질 수도 있다. 삼성의 경우 삼성전자의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의 분할 후 개별 사업부(반도체, 가전, IM, 디스플레이)를 개별 사업계열사로 나눠 권한과 책임을 강화하는 그림이 이미 그려지고 있다.

      시장에선 현대자동차그룹이 어떤 방향성을 보여줄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승계 이슈와 실적 부진이라는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다.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경영권력 집중 현상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들이 이어지고 있다.

      투자은행(IB)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은 여타 그룹들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고 그렇다보니 개별 계열사들의 특성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며 “현대차그룹도 개별 계열사들의 생존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정의선 체제 하에서는 각 산업의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고려해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