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기조 맞추자니…은행 중기 대출 확대 '딜레마'
입력 2017.05.18 07:00|수정 2017.05.19 15:31
    中企대출 절반이 4대 은행 돈
    정부서 협조 요청·독려 가능성
    은행들 외면하기 쉽진 않지만
    리스크 커 무작정 수용 어려워
    • 문재인 정부에선 중소기업 중심 정책에 따라 유동성을 공급해 줄 시중은행들의 역할이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은행 입장에서도 가계대출의 빈자리를 중소기업 대출 확대로 메울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정권마다 내놓은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거나 은행 부실을 키웠던 전례가 있었던 점은 부담스럽다. 정부 정책에 호응하겠다면서도 무리한 중소기업 대출 확대는 어렵다는 분위기가 시중은행 사이에서 감지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 경제 공약은 경제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자리 창출, 노동자 임금 상승, 공정한 분배 등 목표를 위해선 중소기업 육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중소기업청은 중소벤처기업부로 확대·신설하기로 했다. 성장자금과 유동성을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재정과 국책은행 자금도 적극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중은행의 협조도 중요하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들은 직접금융 시장에서 지난 수년간 매년 1조~3조원가량을 조달하는데 그친 반면 대출 규모는 600조원에 육박한다. 이 중 절반 가까이를 4대 시중은행(신한·KB국민·KEB하나·우리)이 책임지고 있다. 때문에 정부가 시중은행에 협조를 요청하거나 독려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감안하면 시중은행이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시중은행으로서도 중소기업 대출 확대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지난 3년간 부동산 경기의 호황을 타고 늘려온 주택담보 대출은 지난해부터 억제 정책으로 성장세가 주춤하다. 새 정부도 가계부채총량제를 꺼내 드는 등 억제 기조를 이어갈 전망이다. 대기업들의 대출 의존도는 하향 추세에 접어든 지 오래다.

      증권사 은행 담당 연구원은 “주택담보 대출을 대신할 먹거리를 찾고 새 정부의 정책 기조에도 맞춘다는 측면에서 시중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더 늘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시중은행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인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아직 세부 정책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고, 국내외 경제 상황 등 살펴야 할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정세 안정과 수출 증가에 힘입어 우리나라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도체 등 일부 품목과 대기업 군에 국한된 것이며 중소기업에까지는 온기가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내수 시장 활성화는 아직 불투명하다.

      중소기업은 금리 상승 대응력이 떨어진다. 글로벌 시장금리는 점차 오르고 우리나라도 새 정부 재정부담에 따른 금리 상승 압박이 커지는 점은 부담요소다. 중소기업 대출은 위험가중치가 높게 반영되기 때문에 은행의 자산건전성에 악영향을 미칠 여지도 많다. 경쟁적인 ‘뒷문 잠그기’로 부실을 낮춰왔던 은행들로선 중소기업 대출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정부에서 중소기업 대출 확대 요청이 오면 협조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면서도 “레버리지비율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급격한 확대보다는 개별 기업의 재무상황과 담보여력을 살펴 선별적으로 집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중소기업 대출 확대가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중소기업 육성 정책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풀어 놓은 ‘선물’이지만 부작용을 낳거나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첫해부터 ‘비올 때 우산 뺏지 말라’며 중소기업 지원을 강조했다. 정책금융기관은 물론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확대를 독려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2008년말 268조원이던 4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규모는 일시적으로 270조원을 넘었으나 2년 후엔 252조원으로 뒷걸음질쳤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리며 부실만 커졌다. 같은 기간 고정이하여신 비율은 2%에서 3%이상으로 높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당선 후 첫 외부 방문지로 중소기업중앙회를 택하며 중소기업 중심 경제정책을 천명했다. 손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중소기업 대출 금리는 낮추고 규모는 늘릴 것을 금융권에 주문했다. 시중은행들은 황급히 중소기업 지원 조직을 신설하거나 저금리 상품을 개발하고 실적 평가법도 바꿔야 했다.

      전 정부 2년차부터 본격화한 기술신용평가(TCB) 대출도 그 일환이다. 규모는 꾸준히 늘었지만 은행들이 정부 인센티브를 획득하거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던 면이 없지 않았다. 기술보다는 담보가 있거나 우량한 중소기업에만 투자하게 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런 경험상 시중은행들은 앞으로도 신중한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소기업 대출 규모를 늘리면서도 안전장치는 강화하고 있다. 2011년 40% 이상이던 중소기업 신용대출 비중을 5년 새 10%포인트 이상 줄였다. 올해 들어선 가산금리를 키워가는 양상이다. 은행들은 갈수록 정부 압박보다는 실적 관리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다른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예전처럼 중소기업 대출을 크게 늘렸다가 은행들이 휘청이면 그것이 국가적으로 더 큰 문제 아니겠느냐”며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기존 전략을 크게 수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