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내 '비공식 컨트롤타워' 버리고 살리고…엇갈린 운명
입력 2017.06.22 07:00|수정 2017.06.23 09:32
    미전실 해체 삼성, 핵심인력 여전…무늬만 해체 '지적'
    BU 체제 전환 롯데, 신 회장의 공백 감당할 인물 없어
    핵심경영진 이동 SK, 지주사 약해지고 수펙스 역할 커져
    지주사 중심 LG, ㈜LG가 그룹 총괄해 상대적 안정
    • 국내 대기업들 상당수가 오너와 일부 가신(家臣)그룹에 의존해 운영돼 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그룹의 생존을 위해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강력한 의사결정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비공식적인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마련됐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고 있다. 오너가의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워 투명한 경영을 요구하고 있다. 새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도 강하다. ▲법적 근거가 없고 ▲권한은 있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며 ▲대관업무를 총괄하며 불법적 상황의 통로가 되는 재계 비공식 컨트롤타워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말 국정농단 청문회에 총수들이 출석한 그룹들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들 그룹의 컨트롤타워는 현재 오너경영인이 처한 상황과 그룹 내 영향력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이하 미전실)이었다. 미전실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으로 지목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전실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최지성 실장을 비롯한 사장, 부사장단은 모두 사직 처리됐고 이하 임원들 역시 퇴사하거나 계열사들로 배치됐다. 하지만 그룹 안팎에선 미전실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냐는 데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우선 ▲그룹 신사업 발굴 ▲인수합병(M&A) 최종 결정 ▲구조조정 ▲사장단·임원 인사 등 그룹 내 주요 업무를 관할해 온 미전실 전략 1팀의 임원들은 고스란히 삼성전자에 자리를 잡았다. 삼성전자 기획실이 이제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기존 미전실 부사장급 임원들은 공식적으로는 회사를 떠났지만 광화문과 마포 등지에 개인 사무실을 열고 출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경영 공백을 대비, 언제든지 ‘컴백’할 수 있는 인사들로 거론된다.

      무늬만 미전실 해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도 없지 않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사장단에 대한 물갈이 인사가 단행될 경우 이를 채울만한 인력들은 사실상 미전실 출신들 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공백 장기화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전했다.

      롯데그룹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책본부 역시 비선 조직으로 지목됐다. 롯데는 정책본부의 역할을 줄이고 개별 사업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비즈니스유닛(BU) 체제를 도입했다. 신동빈 회장에 대한 수사가 계속 되면서 그룹 경영은 사실상 공백 사태를 맞았다. BU 체제 전환은 롯데가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 발 다가섰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롯데의 조직 개편은 여론 의식과 신 회장의 공백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각 BU장들은 현상 유지에 집중할 공산이 크고, 신동빈 회장의 부재 장기화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재계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이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을 다각도로 고민한 것은 맞지만, 연착륙을 위해 상당 기간의 시간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오너 경영에 익숙한, 그것도 2인자가 없는 상황의 롯데가 경영 공백의 타격을 우려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SK그룹은 이들과 반대 행보를 걷고 있다. SK㈜라는 법적요건을 갖춘 지주회사가 있지만 최태원 회장 부재 당시 그룹 중대사에 대한 의사결정은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가 맡았다.

      작년 초만해도 최태원 회장이 SK㈜ 이사회 및 이사회 의장직에 복귀하면서 수펙스의 기능이 약해질 것이라는 전망들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수펙스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는 평가다.

      지난해까지 공동 사장으로 SK㈜를 이끌던 조대식 사장을 수펙스 의장으로 부임시켜 그룹 M&A 총괄을 맡겼다. 함께 지주사에 있던 박정호 사장은 SK텔레콤으로 이동해 도시바 반도체 인수·SK하이닉스의 자회사화 등 그룹 현안을 맡게 됐다.

      핵심 경영진이었던 조대식 사장이 수펙스로 가면서 그룹 지주사인 SK㈜의 존재감이 약해졌다. SK㈜가 투자전문 지주회사를 표방하면서 수펙스가 그룹 컨트롤타워를 맡고 있고 사실상의 ‘옥상옥(屋上屋)’ 비슷한 모양새가 됐다. 최 회장의 복귀와 계열사별 M&A 활성화로 그룹의 분위기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펙스의 역할 강화가 자칫 '비공식 조직의 축소'라는 최근 재계의 기조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반면 LG그룹은 지주회사에 힘을 실어주며 ㈜LG로 컨트롤타워를 일원화하고 있다. 구본준 부회장이 LG전자에서 ㈜LG로 이동,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계열사 현안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이에 지주사인 ㈜LG가 그룹 경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다른 그룹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오너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 지주사 중심의 오너 경영 체제 하에서 부회장급 전문경영인들이 사업별로 책임 경영을 하고 있는 구조다.

      지주회사 체제를 갖췄던 GS그룹은 상설 컨트롤타워가 없는 모양새다. 지주회사 ㈜GS가 계열사 지분을 갖고 주주로서 CEO와 이사 선임 등에 관여하지만 사업 하나하나에 대한 결정은 내리지 않는다. 대신 그룹 차원의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면 사장단회의에서 다룬다.

      한화그룹은 '경영기획실'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각사 파견 형식으로 인력을 받아 경영기획실을 운영하면서 인력·재무·커뮤니케이션·대관·법무 업무를 담당한다. 주요 의사결정 때는 위원회를 열어 계열사 간 역할을 조정하고 중복투자를 막도록 하는 장치도 두고 있다. ㈜한화는 계열사 지분을 가진 지주사 격이기는 하지만 컨트롤타워는 아니다.

      현대차의 경우,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별도 조직은 물론 사장단회의 같은 회의체도 없다. 그룹 내 공통 사안을 조율할 필요가 있을 때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계열사 담당 부문이 협의한다.

      결국 현재 재계의 컨트롤타워는 지주회사의 유무나 오너 경영인의 입지, 사업 특성에 따라 '공식'과 '비공식' 라인을 오가면서 변화를 꾀하고 수명을 이어가고 있다.

      컨트롤타워의 변화는 대기업과 교류를 희망하는 자본시장 관계자들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과거 같으면 M&A나 구조조정, 자산매각 등의 그룹 중대사는 컨트롤타워를 맡고 있는 조직과 얘길 나누면 됐지만, 이제는 계열사들과 개별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재계의 세대교체 과정 속에서 투명한 경영에 대한 요구가 안팎에서 나오고 있어 자연스레 이사회를 중심으로 의사 결정이 진행되는 글로벌 스탠더드화가 진행될 것"이라며 "IB업계도 보다 전문성을 갖고 개별 협상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고 전했다.

      다만 오너가 부재하거나 부재할 가능성이 커진 그룹들의 경우 '비공식' 컨트롤타워 해체에 따른 혼란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자의적인 조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준비 시간도 부족했고, 산적해 있는 그룹의 중대사를 처리할 수 있는 책임자가 부재한 상황이다. 오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만큼, 오너의 귀환과 그의 결정만 기다리면서 그룹 전체가 멈출 수 있다는 우려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