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의 美 WD 매각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행복?
입력 2017.08.29 07:00|수정 2017.08.30 09:43
    • “SK하이닉스가 도시바를 극적으로 품에 안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향후 중국이 '한국의 두 업체가 절반이 넘는 점유율을 활용해 높은 가격을 책정해 부당 이익을 취해왔다. 그간 누렸던 초과 수익을 환수하고, 당분간 중국 내 제품엔 중국에서 생산된 반도체만 사용해야 한다'고 몽니를 부릴 경우 국내업체들 혹은 우리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요?”

      공회전을 거듭하는 도시바 반도체 사업 매각을 지켜본 한 업계 관계자의 평이다. SK하이닉스과 베인캐피탈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확보하며 8부 능선을 넘은 것 같았던 도시바 인수전이 다시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일본 현지 언론에서는 도시바측이 우협 지위를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간 연합으로 넘겼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SK하이닉스의 도시바 인수 시도가 불발로 끝나더라도 국내 반도체 업계에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이미 인수전 참여 시기부터 예고됐던 ‘승자의 저주’, ‘도시바의 3D낸드 기술력에 대한 의문’ 등이 주요 이유로 꼽힌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조바심 섞인 시각이었다.

      현재 낸드플래시 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 수준은 삼성전자(35%)가 독보적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이어 일본 도시바(18%), 미국 WD(17%)가 뒤를 잇는다. SK하이닉스는 약 10% 내외 점유율로 4~5위권에 위치해 있다. SK하이닉스가 도시바를 인수했다면 산술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곳의 점유율 합이 시장 절반을 넘기는 상황을 맞이한다. 실제 대만 홍하이는 우협 지위에서 탈락한 후 “베인캐피탈 컨소시엄은 곧 SK하이닉스로 간주해야되기 때문에 도시바는 사실상 한국기업에 매각된 것”이라는 논리로 여론전을 펴기도 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생산량 절반 이상의 반도체를 소비하는 최대 소비국이지만, 자국 생산량은 10% 후반 수준에 머물러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약 170조원을 들여 '2025년 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는 산업 육성 계획도 대외적으로 밝혔다. 향후 전방위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자국의 반도체 기술력을 확보해 자급률을 일정 정도 끌어올린 후 국내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보호 정책'을 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미 전기차 배터리 등 기존 산업에서 우리나라 업체들이 경험한 바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중국의 칭화유니그룹이 반도체 기술자 1000명을 뽑았는데, 전 세계에서 기술자 5만명이 몰렸다"라며 "심지어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던 기술자도 옮겨가는 등 중국정부 차원의 애국심을 활용한 산업 육성이 시동을 건 모습"이라고 말했다.

      도시바 반도체가 차라리 일본 도시바의 설비를 공동 운영해온 WD에 넘어가거나, 혹은 도시바가 ‘하이닉스’ 사례처럼 일본내 채권단 관리하에 독자생존에 돌입해 한미일간 '황금비율'을 유지하는 방향이 나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 일본 기업과 점유율을 분산한 산업 구도를 이뤄 경쟁하는 편이 향후 중국 변수에 무역 보복 등을 통해 대항할 수 있는 안전판이 될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해 중국에 진출한 배터리 업체들의 호소에도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온 산업자원부 등 국내 당국에 대한 자조섞인 시각이 반영됐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견제를 펴오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15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 행정조치를 통해 중국의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인수에 막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중국 정부 자금을 활용한 반도체 기업 인수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위배될 뿐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에서다. 독일 반도체 회사 아익스트론을 인수하려던 중국 기업의 시도도 무산됐다. 일본도 도시바 매각 초기부터 국가 안보 및 기술 유출을 이유로 중국 기업의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

      미국은 최근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강경한 대중 외교에 나서며 중국의 반도체 육성에 제동을 걸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최근엔 중국계 자본의 미국 반도체 장비회사 엑세라(Xcerra) 인수를 두고 양 국간 외교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이달 미국이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강제 기술 이전 요구 등 부당한 관행 조사 및 제재에 나서며 중국의 메모리 진입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고, 허페이와 푸젠성 등 중국업체가 확보한 마이크론의 기술 활용이 어려워졌다"며 "대신 다른 업체의 기술을 벤치마킹 할 수밖에 없고, 기술개발과 확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해 올해 팹 건설을 통해 내년부터 일부 생산하려던 계획이 지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외 변수 외에 SK그룹 입장에서도 일부 성과를 거뒀다. 실사를 통해 3D낸드 기술력 수준을 면밀히 검토했을 뿐더러, 그룹 내외의 '마케팅' 차원에서도 쏠쏠히 활용했다는 평가다.

      세계 2위권 업체 인수를 시도할 정도로 존재감이 커진 SK하이닉스는 SK그룹이 내세운 '딥체인지 2.0' 상징으로 발돋움했다. 그룹 내 관계자는 "(도시바 인수전이) 타 계열사 CEO를 자극하고 적극적 M&A 등 최태원 회장이 의도한 방향으로 기업 문화를 바꾸는 데 효과를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종 무산되더라도 인수전을 이끌어온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의 존재감을 키우는데도 한몫했다. 조대식 수펙스 의장과 수면 아래에서의 경쟁에도 우위에 섰다는 그룹내 평가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SK하이닉스의 존재감을 부각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IT담당 증권가 애널리스트는 "일부 글로벌 고객들은 D램으로 유명한 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를 만드는지 몰랐던 곳도 많을 정도로 낸드 분야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했다"며 "이번 기회로 예상 못한 홍보효과를 거두게 됐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