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IB, 꼭 필요할까?
입력 2017.10.26 07:00|수정 2017.10.27 10:04
    20년 된 '절대 명제' IB 육성
    키운다고 경쟁력 생길까 의문
    M&A 자문 외국계 선호 여전
    기업 간의 직접 거래도 늘어나
    영역 특성화·인재 양성 '시급'
    • "초대형 투자은행(IB)이 정말 필요할까?" 'IB 육성'이 국가적 과제였던 지난 20년 동안엔 자본시장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질문이 여의도의 화두로 떠올랐다. 증권사의 대형화·모험자본 육성으로 대표되는 '절대명제'가 비현실적이고 시대와 동떨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들린다.

      이 논란은 결국 국내 증권사가 규제 완화로 넓어진 사업영역과 늘어난 자본을 활용해 고도화된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전망은 대체로 '어둡다'는 평가가 많다.

      국내에서 IB 육성이 화두가 된건 지난 1997년의 일이다. 외환위기 직후 국내 자본시장에 외국계 IB들이 대거 진출했다. 국내 금융사들은 JP모건이 판매한 파생상품을 사들였다가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한미은행·조흥은행·외환은행·서울은행·하나로통신 등 구조조정 과정에서 파급된 대규모 인수합병(M&A) 거래는 모두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메릴린치 등 외국계 IB의 손에 이뤄졌다.

      국내 증권사들은 이런 대규모 거래에 끼어들 능력이 없었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때 느낀 박탈감은 10년 뒤인 2007년 자본시장법 탄생의 초석이 됐다. 자본시장법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윤증현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앞으로 3~4년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IB가 나올지를 결정할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자본력을 갖춘 '대형 IB'의 필요성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그 후 다시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상위 5개 대형증권사의 자기자본 규모는 총 25조원에 달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프라임브로커(prime broker)를 중심으로 한 종합금융투자사업자(통칭 대형 IB) 제도도 도입됐다.

      그렇다 해서 국내 증권사가 글로벌 IB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경쟁력을 갖췄을까?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다. 지난 10년간 국내 자본시장 리그테이블 재무전략 자문 부문에서 국내 증권사가 1위를 차지한 사례는 없다. 2016년 인베스트조선 리그테이블 재무전략 자문 순위(발표 기준)에서 상위 10위에 진입한 국내 증권사는 KB증권 한 곳 뿐이다. 올해 3분기 기준으로는 '제로'다. 순위권에 진입한 국내 증권사가 전무하다.

      지난해 연간 기준 국내 증권회사들이 올린 총 영업이익(판관비 차감 전)은 약 10조원이다. 이 중 수탁수수료가 37%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대형증권사도 중소형증권사도 여전히 천수답(天水畓)식 사업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

      채권관련 이익 비중도 쏠림이 심하다. 40%에 이른다. 2013년 이후 지속적으로 금리가 떨어지며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채권 비중을 높였다. 현재 증권업계가 보유한 채권 총액은 190조원에 달한다. 이는 금리가 상승기로 접어들며 고스란히 위험요인으로 바뀌고 있다.

      IB 관련 수익은 1조3000억여원으로 10% 안팎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이 수익 중 상당수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매입약정 등 PF의 위험을 대신 떠안고 올린 수수료 수익이다. 신용평가사들이 추정하고 있는 증권사 PF 우발채무 규모는 현재 25조원에 달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올초 초대형 IB 관련 규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당초 정부는 초대형 IB가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 중 10%까지만 부동산 관련 투자에 쓸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하려 했지만, 증권업계의 항의를 받아들여 이를 30%로 상향조정했다. 당초 정부가 자기자본의 200%까지 어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한 취지는 모험자본을 공급해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라는 것이었지만, 증권사들은 당장 돈이 되는 부동산 투자에만 관심을 집중한 것이다.

      증권사들은 초대형 IB 인가가 나면 기업금융용 자본도 상당부분 인수금융 부문에 배치한다는 포석이다. 인수금융은 대형 M&A때 인수자편에 서서 자금을 공급해주는 것으로, 메자닌(mezzanine)등 여러 유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대출에 속한다. 경쟁업계인 은행권 일각에서 '초대형 IB가 아니라 초대형 LB(Loan Bank)가 될 것'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실정이다.

      변화하고 있는 시대상도 초대형 IB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2014년 삼성그룹과 한화그룹 사이의 빅딜(big-deal)이 대표적인 사례다. 두 그룹은 거래 준비를 모두 내부에서 진행했고, 자문사로는 회계법인과 법무법인만을 소수 고용했다. 자문사(advisor)로서 증권사의 존재 의의에 물음표를 던진 거래였다는 평가다.

      '국내 IB'에 대한 수요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국내에서의 M&A나 성장전략에 한계를 느끼고 앞다퉈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2015년 이후 점차 강해지는 추세다. 해외 네트워크가 취약한 국내 증권사는 매수자·매도자를 찾아오는(sourcing) 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 가장 대규모 M&A였던 카버코리아 매각의 자문을 노무라가 맡은 건 인수자인 유니레버를 이끌어온 까닭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해외 M&A가 늘어나며 현지 사정에 밝은 현지 자문사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이 됐다"며 "채권 발행 등 라이선스가 필요한 발행업무를 제외하면 국내 증권사와의 접점이 줄어들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에 참여한 SK가 베인캐피탈과 손을 잡은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지적이다. 당초 SK에 먼저 구애의 손길을 뻗은 건 국내 1위 IB를 보유한 미래에셋그룹이였다. 조 단위 자금 지원을 약속하며 손을 뻗었지만, SK는 베인과 손을 잡았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명분과 실리 모든 면에서 SK가 미래에셋그룹을 선택하긴 어려웠을 거라는 관전평을 내놨다.

      그렇다면 국내 증권사에 남은 길은 무엇일까. 일단 무리한 자본 확충보다는 특성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평가다. 백화점식 사업 진열에서 벗어나 자기자본투자에 강한 골드만삭스, M&A에 강한 씨티, 구조화금융에 강한 JP모건, IPO의 메릴린치 등 시장을 뒤흔들수 있는 사업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무경험과 언어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평가다. 2008년 이후 국내 증권사에 대규모로 유입된 유학파 인재들은 대부분 회사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경직된 조직 구조와 급여 체계, 단기 수익에 몰두하는 경영방침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자본시장에서 가장 필요로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최근 중견기업의 구조조정과 지배구조 개편, 승계 준비 자문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국내 증권사는 손에 꼽을 정도라는 평가다. 국내 IB 업계의 맏형인 정영채 NH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는 초대형 IB 도입을 앞두고 "증권사의 본질은 '투자'가 아닌 '채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