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미래' 찾는 삼성전자…美 경영진 위상변화 예고
입력 2017.10.27 07:00|수정 2017.10.27 10:05
    '반도체'서 '데이터'로 변모하는 삼성전자
    HW 기반 '한국'서 SW 중심 미국으로 구심축도 '이동'
    미래 그려온 SSIC·삼성넥스트, 경영진 위상 변화 '가능성'
    • 지주회사 체제를 포기한 삼성그룹의 구심점은 사실상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미래사업 발굴은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진 지 오래고 신사업이라 여기던 산업은 이미 삼성전자를 지탱하는 중심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미국 내 핵심 인사들이 있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의 와병(瓦甁)이후 경영일선에 나선 이재용 부회장은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국내 비핵심 계열사를 빠르게 정리했다. 불과 6개월 만에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테크윈 등 화학 ·방산부문을 한화그룹에 매각했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삼성정밀화학과 삼성SDI의 케미칼사업부 등을 롯데그룹에 팔았다. 2014년 상반기 총 73곳이던 국내 계열사는 현재 62곳으로 줄었다. 금융계열사가 편입된 것을 제외하면 국내 계열사의 감소폭은 이보다 더 컸다.

      계열사 슬림화 작업과 달리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사업확장은 속도를 냈다. 투자는 주로 해외기업에 집중했다. 이는 호황 사이클을 맞은 반도체 사업이 원동력이 됐다.

    • 실제로 2013년 단 2건에 불과하던 삼성전자의 해외기업 인수는 이재용 부회장이 집권(集權)한 2014년에 5건으로 늘었고 지난해엔 9건을 기록했다. 3년 만에 20건이 넘는 해외 M&A가 성사됐고 60여곳 넘는 기업에 지분을 투자했다. 투자기업 대부분이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전통적인 하드웨어 제조 기반이 아닌 사물인터넷(IoT)과 데이터 등 소프트웨어(SW) 기업이었다.

      해외 M&A의 핵심은 삼성전자 미국법인(SEA) 소속인 삼성전략기술센터(SSIC), 지난해 8월 미국에서 독립법인으로 출범한 삼성넥스트(舊 글로벌이노베이션센터)이다. SSIC는 굵직한 해외기업 발굴과 M&A, 삼성넥스트는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 발굴과 투자에 주력한다. 국내기업 최대규모 M&A였던 삼성전자의 하만(Harman international)인수, 이제는 상용화된 삼성페이와 빅스비의 원천기술을 보유했던 루프페이(LoopPay), 비브랩스(VIV Labs) 모두 SSIC와 삼성넥스트가 주도했다.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의 '눈'과 '브레인' 역할을 톡톡히 해낸 SSIC와 삼성넥스트는 손영권(최고전략책임자, 미국명 Young Sohn) 사장과 데이비드은(David Eun) 사장이 이끌고 있다. 이 둘 모두 이재용 부회장의 핵심 인사다.

      최근에는 특히 활발한 경영활동에 나서고 있다. 손영권 사장은 이달 초 미국에서 열린 '삼성CEO서밋'에서 삼성전자를 대표해 회사의 정체성이 '데이터'로 변모할 것임을 선언했다. 데이비드은 사장은 최근 발표를 통해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 등 신사업 투자에 주력하고 이 같은 투자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는 반도체를 이을 삼성전자의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아왔고 , 또 일정수준 이상의 성과를 낸 미국 내 인사들의 주목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국내 경영진 운신의 폭은 그리 넓지 않은 모습이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을 발표한 당일, 반도체를 통해 삼성전자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어 오던 권오현 부회장이 사임 의사를 나타냈다.

      권 부회장이 퇴진하며 남긴 '성장동력을 찾는 일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말은 곧 삼성전자를 지탱하던 기반이 더 이상 전통 제조업에 있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는 삼성전자의 구심점이 하드웨어에 기반한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인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SSIC와 삼성넥스트의 출범 이전부터 삼성의 '10년 후 미래산업'을 고민해 온 국내 삼성종합기술원의 위상은 축소된 지 오래다.

      권 부회장의 퇴진과 동시에 올 연말 임원인사를 앞두고 윤부근(CE)·신종균(IM) 대표이사, 김기남(반도체)·이상훈(경영지원실) 사장, 이인종(무선개발) 부사장 등 국내 주요 임원진의 거취에 대한 전망이 나오고도 있지만 이보다 미국법인과 핵심부서, 또 주요 임원진들의 위상변화에 더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이번 권 부회장의 퇴진으로 예고되는 대규모 인사에선 이 부회장이 한국과 미국, 기존 사업과 신사업 등 어떤 분야에 힘을 실을지에 대한 방향성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며 "각종 정치이슈나 규제를 고려할 때 삼성전자가 한국에 남아있을 명분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신사업 발굴에 힘을 보태온 핵심인사들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 삼성그룹의 헤게모니가 해외로 이동하면서 국내 자본시장과의 접점은 갈수록 적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활발한 투자활동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는 이미 신사업 발굴과 크고 작은 M&A를 모두 자체 인력과 네트워크으로 해결하고 있다. 국내 자본시장에서 내로라하는 금융업체들도 삼성과 하만 거래를 통해 더 이상 삼성의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다.

      재무적 상황이 여의치 않아 급하게 자금을 조달 해야 하는 소수 계열사를 제외하곤 금융시장을 찾을 여지도 줄고 있다. 한 때 채권자본시장(DCM)에서 큰손으로 불린 삼성 계열사들은 순상환 기조로 전환해 올해 단 1건의 채권 발행도 추진하지 않았다.

      삼성그룹 즉 삼성전자 구심점의 이동은 국내 자본시장에서의 이 같은 현상을 고착화 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이 국내 자본시장과의 접점을 '유지'할 유인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삼성바라기'를 자처했던 국내 금융사들 나름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