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뱅크 IPO로 현금 쌓는 현대중공업, 非조선 강화 발판 구축
입력 2018.01.03 07:00|수정 2018.01.04 09:26
    현대로보틱스, 오일뱅크 IPO로 최대 수 조원 확보 전망
    조선3사 점진적 축소 가능성…非조선 계열사 투자는 확대
    日 미쓰비시重, 세계1위 조선업 포기 후 신사업 추진 사례도
    • 현대중공업그룹이 수년간 묵혀왔던 현대오일뱅크의 기업공개(IPO) 카드를 결국 꺼냈다. 당분간 조선업의 호황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향후 수년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비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상장을 통해 마련된 대규모 자금은 조선업에 쏠린 사업구조에서 벗어나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신사업 계열사 투자에 집중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대오일뱅크의 상장을 통해 지주회사인 현대로보틱스는 최대 수조원에 달하는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로보틱스는 현대오일뱅크의 지분 91%를 보유하고 있고 절반가량의 구주매출을 가정해도 경영권 유지에는 무리가 없다는 평가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2010년 현대오일뱅크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 현대오일뱅크의 상장을 추진했다. 하지만 유가 하락을 비롯한 대내외 악재로 실적은 급락했고 상장은 무산됐다. 이후 정유·화학 업황은 수년간 침체기를 거친 뒤 다시 살아났고 현대오일뱅크의 실적과 재무구조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최초 상장을 추진했을 당시와 비교해 현재 IPO의 성공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는 평가다.

    • 상장을 통해 마련된 자금은 일단 주력사인 현대중공업 지원에 사용된다. 현대중공업은 2017년에 간신히 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4분기에 3600억원 이상의 영업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실적 악화가 심하다. 그동안 수주가 부진했던 탓에 2018년에 수주가 늘어나더라도 향후 수년간 침체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내년 상반기 1조3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계획 중이다. 최대주주이자 지주회사인 현대로보틱스가 3500억원가량을 출자한다. 현대로보틱스가 현재 보유한 현금은 약 4300억원, 당장 지출한다 해도 현대오일뱅크 IPO로 이를 채울 수 있다.

      유상증자가 완료되면 현대중공업 조선 3사는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고 순현금을 보유하게 된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사업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겠단 전략이다.

      그룹 차원으로는 장기적인 전략 변화가 예상된다. 현재 그룹 내에서 조선 3사의 비중이 압도적인데 이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고 대신 신사업 분야인 로봇·전자·기계·서비스 등 각 계열사의 성장전략 마련에 더 힘을 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대중공업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조선업의 경우 경기변동에 민감하고 업황에 따른 부침이 심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그룹 전체가 수년을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며 "조선업의 부진을 만회할 수 있는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부침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4월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면서 각 계열사가 독립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 현대중공업의 부진이 계열사에 전이되지 않으면서 지주회사는 계열사를 직접 지원할 수 있는 구조다. 사업부들이 각 회사로 분할되면서 자본시장과의 접점이 늘어나는 효과도 봤다. 실제로 현대로보틱스와 현대일렉트릭 모두 유상증자를 실시해 시장에서 6000억원이 넘는 현금을 확보했다.

      현대중공업을 제외한 계열사들 사업 분야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현대로보틱스의 사업영역인 산업용 로봇시장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연평균 11%의 규모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고 이 같은 추세는 오는 2020년까지 지속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대일렉트릭이 영위하는 전기전자기기 산업의 시장규모는 지난해 약 270조원에서 2020년엔 340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건설기계가 집중하고 있는 신흥국 시장도 건설기계 성장세가 뚜렷하다.

      주력인 조선업 비중을 줄이고 신사업 확장에 나선 사례는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한때 세계 1위 선박건조업체였지만 1983년 현대중공업에 1위 자리를 내줬다. 호황이 지속되는 동안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사들은 선박과 해양플랜트 부문에 집중했지만 저성장 늪에 빠진 일본 조선업체들은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실제로 미쓰비시중공업은 현재 선박건조 사업에서 대부분 철수한 상태다. 대신 첨단사업의 한 분야인 우주항공·레이저통제·크루즈 건조 등 사업구조를 완전히 바꿨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몇몇 분야에선 선두업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애초 미쓰비시중공업과 같은 종합 중공업 업체로 거듭나기 위한 사업 다각화 전략을 구상해 왔지만 생각만큼 잘 이뤄지지 않았다"며 "국내 조선 3사 중에선 (현대중공업이) 그나마 상황이 제일 낫기 때문에 당분간 조선업 경쟁력을 이어가면서 장기적으론 다른 사업의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