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웨이(Apple Way) 따라가겠다더니"…정반대 길 걷게 된 이재용 부회장
입력 2018.08.23 07:00|수정 2018.08.24 10:30
    삼성, 사상 최대 180조 투자 발표
    이 부회장 "설비투자 줄이겠다" 발표와 정반대
    설비투자 줄이고 현금 벌어들이는 애플과 대조
    "삼성 집중도 높아져" 산업 생태계 구축 실패 지적도
    • 미국 애플(Apple)과 같은 길을 걷겠다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전략은 사실상 실패했다. 삼성그룹은 시설·설비투자(CAPEX)를 줄여 경영 효율화를 꾀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180조원, 사상 최대 투자라는 정반대의 결론을 만들어 냈다.

      정부는 삼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더 높아졌음을 보여줬고, 삼성은 내부에 집중된 기술개발·생산·판매 시스템의 체질 개선에 실패하며 산업 생태계 구축에 실패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이재용 부회장 2심 공판이 진행되던 지난해 7월,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공개된 자료에는 이 부회장이 그린 삼성그룹의 청사진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부회장은 홍완선 전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장기적으로 애플처럼 설비투자는 많이 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사업구조로 삼성을 변화시키겠다"고 밝혔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삼성그룹은 이재용 부회장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대규모 M&A는 사라졌고, 시설투자는 전례 없이 늘어났다. 삼성그룹은 매년 30조원 안팎의 투자를 진행해왔는데 앞으로는 이보다 2배 이상 늘어난 투자를 예고했다.

      향후 3년간 총 180조원을 투자할 계획인데, 이중 약 130조원은 국내에 투자한다. 이를 통해 직접고용 4만명, 간접고용 70만명의 일자리 창출효과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지 한 달여만,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독대한 지 이틀 만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 이는 이재용 부회장이 따르겠다던 애플의 전략과도 상반된다.

      지난해 애플의 매출액은 약 2300억달러, 우리 돈 약 260조원으로 삼성전자의 연결 매출액 240조원과 유사했다. 애플은 이중 464억달러(52조6700억원)가량을 재투자했는데, 이중 부동산과 시설·설비에 투자한 금액은 124억5000만달러(14조1200억원) 정도로 전체 매출에서 설비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5.4% 남짓이다. 삼성전자가 전체 매출액 대비 18%(43조원)를 시설·설비에 투자한 것과 비교된다.

      애플은 삼성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설비 투자 규모에도 불구하고 한해 480억달러(약 50조원) 이상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삼성전자(42조원)보다 많은 현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는 애플이 직영 생산공장을 운영하지 않고 외주업체 위탁생산(아웃소싱) 위주의 생산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애플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아이폰은 대만 업체인 홍하이정밀공업(폭스콘)에 대부분 맡기고 있다. 애플은 일부 생산 설비에 대한 투자를 지원하고 마진율을 협상해 수익을 거두는 시스템으로 전해진다.

      IT업계 한 관계자는 "애플은 철저한 아웃소싱 위주의 전략을 펼치다 보니 고정비에 대한 부담이 훨씬 적을뿐더러, 생산업체에 대해 협상력을 갖고 있어 안정적인 영업이익률을 유지할 수 있다"며 "애플에 비해 반도체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삼성과 절대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수익성 위주의 전략을 펼치려는 삼성전자 또한 오래전부터 이 같은 생산 시스템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 애플은 올 상반기 월가의 전망치(컨센서스)를 크게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했고 주가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올 2분기부터 실적이 꺾이기 시작하면서 주가 또한 지지부진한 삼성전자와는 대조적이다.

      삼성전자의 실적을 이끄는 반도체(DS) 부문의 우려가 주가에 반영돼 있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반도체만으로 주가 부진을 설명하긴 어렵다는 평가다. 삼성전자 주가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주요 반도체 회사를 대상으로 산정한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SOX)와 수년간 연동돼 왔는데, 최근 들어선 괴리율이 높아지는 모습이다.

      국내 한 기관 주식운용 담당자는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의 경우 삼성전자 주가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 왔는데 최근에는 연동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며 "삼성전자의 반도체뿐 아니라 모바일의 부진, 가전 사업의 정체, 투자 방향, 거버넌스 이슈 등 전반적인 요인들이 주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 발표에 대한 실효성을 논하기엔 이르다는 평가도 있다. 인공지능(AI)과 5G·바이오·전장 등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힌 만큼 신사업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는 투자자들도 있지만, 구체적인 밑그림이 제시되지 않은 탓에 '정부 코드 맞추기' 발표에 그칠 것이란 실망감도 나타난다.

      삼성그룹의 투자 발표로 인해 재계와 노동계를 망라한 국내 경제의 삼성그룹 의존도가 높아지는 계기가 될 것이란 지적도 있다. 선도적인 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을 갖추고, 국내 고용 창출에 이바지하는 점은 높게 살 만하지만 삼성이 진출한 사업 분야의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고용 창출의 효과보다 더 큰 기회비용을 치를 수 있다는 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