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 낭비 vs. 시장 안정…외평채 발행 두고 의견 분분
입력 2018.09.05 07:00|수정 2018.09.07 09:24
    외평채 발행, 자금 급한 기업엔 방해만
    “미국채는 투자하는 대로 손실” 지적도
    수익성보다 외환 시장 안정성이 중요
    “꾸준히 발행해야 실질적 가격 형성”
    • 최근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을 앞두고 시장에서 다양한 평가가 오가고 있다. 과거보다 그 역할이 작아졌음에도 손실을 감수하고 발행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정작 자금이 필요한 기업의 앞길을 막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반면 국내외 정세가 매년 급변하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외평채 발행으로 해외 투자 심리를 꾸준히 살필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특히 올해는 신흥국 불안이 커지고 미국 금리도 인상기기 때문에 달러를 미리 조달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외환 시장 안정을 목적으로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을 조성, 운용한다. 주요 재원은 외평채를 발행해 조달한다. 올해는 산업은행과 외국계 증권사 4곳의 주선으로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 규모 외평채를 발행한다. 정부는 아직 발행 일정을 정하지 않았는데, 이르면 9월 중 절차에 들어갈 것이란 전망이다.

      외평채 발행으로 조달한 외화 자금은 외국환 매매, 한국은행 등 국내외 금융기관에 예치 또는 대여, 한국투자공사에 위탁 등 방식으로 운용된다. 운용할 때는 안정성, 유동성 및 수익성을 고려하도록 돼 있다. 미국 국채(T, Treasury Bond)나 일본 국채, 주택저당증권(MBS) 등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달러화 외평채를 발행할 때는 미국 국채 금리가 기준이 된다. 이 금리에 가산 금리가 붙는 식이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면 그 자체로 가산 금리만큼 손실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실이 불 보듯 뻔한데 외평채를 발행해 혈세를 낭비할 필요 있느냐는 것이다. 손실은 만기 동안 누적된다.

      국회에서도 외평기금의 손실을 지적하는 사례가 있었다. 감사원은 작년 기획재정부 기관운영감사 보고서를 통해 외평기금의 운용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업에 기금을 대출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정부는 IMF 외환위기에 흔들리던 1998년 40억달러 규모 외평채를 발행했다. 10년물 금리는 T+355bp(1bp = 0.01%), 5년물 금리는 T+345bp에 달했지만 달러를 확보하고 정부 신인도도 확인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30억달러 규모 외평채를 발행해 기업들의 해외 자금조달 길을 뚫는 역할을 다했다.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 조달 금리를 낮추는 데도 도움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외평채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예전보다 퇴색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환보유고는 꾸준히 늘어 4000억달러를 넘어섰고, 기업들도 스스로 해외에서 자금 조달 창구를 넓혀가는 상황이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외평채 벤치마크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기 발행 채권의 유통수익률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발행 규모도 외평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외평채를 발행하면 다른 국내 기업들은 일정 기간 발행 날짜(윈도우)를 받기 어려워진다. 최근 산업은행의 사무라이본드처럼 통화가 다른 경우엔 발행이 가능하지만 같은 통화일 경우엔 일정이 밀릴 수밖에 없다. 해외 자금 조달이 필요한 기업이나 주선사 사이에선 차라리 발행 허가제로 바꾸는 게 낫다는 푸념도 나온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정작 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에겐 방해가 되고 얻는 것은 많지 않은 외평채를 왜 발행하려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정부의 노력으로 투자자의 관심이 많았고 성공적으로 발행됐다’는 보고서 한 장을 남기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외평채 발행에 관여하는 쪽에선 여전히 그 필요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나라 이름으로 발행되는 외평채는 좋은 조건에 발행되면 국내 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금융 위기일 때보다 필요성이 크다고 보긴 어렵지만 성공 가능성이 있다면 매년 얼마간 발행해서 나쁠 것 없다는 것이다.

      채권 업계에 따르면 달러화 채권은 발행 초기엔 거래가 많지만 1년 이상이 경과하면 거래가 급격히 뜸해진다. 이후에는 거래보다는 만기까지 보유하는 기관이 많다. 외평채도 마찬가지로 1년이 넘으면 거래가 줄어들고 적정한 수준의 시장 가격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정기적으로 발행해 가격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외평채 발행에 자문을 제공하는 한 기관 관계자는 “외평채로 조달한 자금으로 미국 국채를 사면 어느 정도는 손실이 날 수 있지만 같은 만기의 채권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꼭 만기까지 보유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며 “외평기금은 외환 시장 안정 목적이 우선이기 때문에 수익률에 크게 목맬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최근 신흥국들이 불안하고 미국 금리 인상기에 접어들면서 외화 유동성이 감소하는 상황이라 미리 달러를 쌓아둘 필요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외평채 발행의 당위성이 입증되기 위해선 좋은 조건을 받아 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에 온기가 돌아야 하고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사건이 있는 것도 좋다. 시장에선 정부가 남북 관계가 다시 해빙 무드로 돌아서거나 종전선언 등 긍정적인 요소가 가시화 할 때를 살펴 외평채 발행에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른 자문 기관 관계자는 “외평채의 실질적인 기능은 있지만 그 발행 시기는 ‘대통령 해외 순방 후 발행 금리를 낮췄다’는 등 정치적 흐름에 맞추곤 했다”며 “아직 발행 일정을 확정하지 않는 것도 그런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