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미래엔 질보다 양…국내 기업 생존 키워드 "체격을 키워라"
입력 2019.01.25 07:00|수정 2019.01.28 10:14
    금융위기 이후 재무건전성 개선
    2~3년간 버틸 '재무 체력'은 비축
    매출 볼륨 유지해야 글로벌 경쟁
    • 지난 10년간 우리 기업들의 머리 속은 ‘재무 건전성’이라는 단어가 지배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내 기업들의 줄도산을 불러 온 외환위기를 잠시나마 떠올리게 했다. 이는 곧 부채 감축, 즉 디레버리징(Deleveraging) 시대를 열었다.

      빌린 돈은 갖고 있는 돈이나 번 돈으로 갚았다. 한 발 더 나아간 기업은 보유 자산을 팔아 빚을 갚기도 했다. 여유가 있는 기업은 ‘유동성’이라는 금고를 채웠다. 정부나 정치권, 여론이 “기업들이 시장에 돈을 풀지 않고 제 배만 불린다”며 비난과 투자 종용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급변하는 바깥 환경까지 감안하면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덕분인지 여의도를 중심으로 금융시장에선 대내외 환경의 불확실성 증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우리 기업들의 재무건전성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안심하는 분위기다.

      최근 몇 년간 주요 산업을 중심으로 업황이 우호적인 흐름을 이어가면서 주력 기업들의 영업 실적은 개선세를 보였다. 일부 문제가 있었던 산업 섹터에선 구조조정이 진행돼 재무구조가 개선됐다. 그로 인해 10년전 건설 등 특정 산업의 신용등급 일괄 하향 같은,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만한 신용위험은 줄었다.

      외환위기 20년, 글로벌 금융위기 10년이 지난 2019년은 대내외 환경의 불확실성이 한층 증폭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면서 그 불확실성은 당분간 상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는 여전히 ‘재무건전성’일까.

      신용평가사를 비롯한 국내 금융권은 기업들이 2~3년은 버틸 수 있는 재무 체력을 비축했다고 평가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부채를 줄이고, 자산을 매각해 유동성을 확충한 결과다. 하지만 이는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디폴트 값’이다.

      앞으로 2~3년간 이 '체력'을 바탕으로 지금의 '체격'을 키우지 못하더라도 유지할 수 있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주요 재무지표에서 수익성보다 매출, 질보다 양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작게는 미중 분쟁과 그에 따른 후폭풍, 크게는 IT와 자동차 등 글로벌 규모로 진행될 산업 구조조정으로 각 기업간 생존을 위한 각축전이 치열해질 것“이라며 “글로벌 시장 1위가 아닐 경우 기업의 영속을 꾀하려면 일정 부분의 수익성을 포기하더라도 매출 볼륨을 유지할 수 있어야 다음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매출 방어 전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수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축구로 예를 들자면 후방에서 끊임없이 공을 돌리며 점유율을 높이고 재정비를 기반으로 몇 번 찾아오지 않을 공격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공을 주고 받으면서 선수들 간의 스쿼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견조한 매출'을 의미한다.

      이에 비춰보면 몇 년 뒤에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채 지금의 사업을 계속 할 수 있는 기업이 얼마나 될 지 장담할 수 없다. 어떤 기업들은 한동안 수익성 위주의 사업 전략을 펼치면서 매출을 늘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또 다른 기업들은 글로벌 업황 또는 개별 경쟁력 약화로 매출이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최근 반도체 고점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글로벌 시장 1위라는 타이틀이 갖는 힘은 크다. 치킨게임 이후 시장의 공급량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업자인만큼 중장기적으론 지금의 논란이 큰 의미가 없다는 평가다. 삼성전자는 앞으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반도체 분야에서 인수합병(M&A)을 통해 반도체 볼륨을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

      현대자동차는 반대 상황이다. 신차 효과로 국내에선 시장점유율이 회복되긴 했지만 미국 시장에선 쉽지 않다. 중국에서는 현대차만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공장 가동률을 끌어올리는 것도 여의치 않다. 글로벌 메이커로 성장한만큼 품질 문제에 따른 비용 발생은 더 이상 비경상적인 요소로 보기 어렵다. 앞으로 출시될 신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얼마나 선전하느냐, 그로 인해 매출과 시장점유율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가 정의선 시대의 최대 과제이자 난제라고 할 수 있다.

      LG전자도 고민은 많다. 가전 부문에선 선전하고 있지만 스마트폰 부진은 말 그대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LG전자는 스마트폰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금처럼 플래그십 개발을 위해 ‘밑 빠진 독’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 부을 것인지, 시장 불황을 견딜 체력이 있는지 투자자들의 우려는 커져만 가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사면초가다. 장담했던 대형 OLED 시장 개화 속도가 기대보다 너무 느리다. 중국 LCD업체들의 추격 속에서 LG디스플레이가 대형 OLED 확대를 견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SK그룹은 가장 많은 고민을 하는 기업집단일지도 모른다. 업황 호황의 한계에 직면한 계열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정리할 사업은 정리하고 키울 사업은 확실히 밀어주고 있다. 더불어 매출 유지 혹은 확대를 위해 전 계열사가 경쟁적으로 신사업 발굴에 여념이 없다. 결과는 지켜봐야겠지만 4대그룹 중에선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게 사실이다.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기업은 소수다. 국내외에서 매출 볼륨을 유지 또는 확대할 수 있는 산업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2~3년 뒤에도 글로벌 브랜드 가치 인포그래픽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자리잡고 있을까. 중견 기업들은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너 경영인 혹은 최고경영자는 중장기적 통찰력과 결단력을 갖고 있나. 그동안 금융시장은 마냥 기다려줄까. 그 어느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