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넘치고 대기업은 위축…PEF 간 손바뀜 거래 늘 듯
입력 2019.06.21 07:00|수정 2019.06.24 09:37
    태림포장 등 대형 매물 회수 대기
    자금 갖춘 PEF 간 세컨더리 기대
    • 사모펀드(PEF)발 대형 M&A가 줄줄이 예고돼 있지만 그 행선지가 대기업이 될 가능성은 전보다 줄었다. 움직임이 위축된 대기업보다 돈을 쌓아두고 있는 다른 PEF로의 매각을 기대해야 할 것이란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다. 대형 투자처 발굴 측면에서도 사업정리 마무리 단계의 대기업보다 다른 PEF의 포트폴리오를 살피는 것이 유리할 것이란 평가다.

      최근 국내 PEF 시장에선 대형 매물들의 회수 움직임이 잦아지고 있다. 두산공작기계와 태림포장 매각이 본격화했고 한온시스템, 쌍용양회, 대한전선 등의 매각도 언제든 시작될 수 있다.

      과거 이런 대어들의 종착지는 대부분 대기업이었다. 너무 높은 기대치, 시장의 외면으로 회수가 쉽지 않다던 매물들도 결국은 빈 곳을 채우려는 대기업의 품에 안겼다.

      수년 새 분위기는 달라졌다. 강화하는 규제에 정치적 위험까지 고려해야 하는 대기업의 M&A 행보는 조심스럽다. 국내에선 잡음을 만들기 부담스러워 한다. 그나마 활발하던 SK그룹과 CJ그룹도 최근엔 숨고르기에 나선 모양새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180조원 투자 의지를 재확인했지만 국내서 확보할 원천 기술이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자금력을 갖춘 PEF간 세컨더리 거래가 늘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PEF의 청산 기한과 다른 PEF의 투자 시기가 맞아 떨어진다면 양 쪽 모두 윈윈 할 수 있다. 투자 및 관리 보수를 취할 기회를 넘겨 받는 모습이다.

      해외에선 PEF간 손바뀜 거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운용사 수장간 의사 소통이 원활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익률이 기대된다면 세컨더리 투자 결정이 손쉽게 이뤄진다.

      KKR은 최근 벡터캐피탈로부터 그래픽 소프트웨어 업체 코렐코퍼레이트를 1조원 이상에 인수했다. 지난 수년 간 비즈니스 회계 소프트웨어업체(exact software), IT솔루션 업체(BMC), 커피자동판매 사업(Selectal), 동물병원 체인(Petvet) 등을 PEF로부터 사오기도 했다. TPG는 최근 의료 서비스 데이터 관리 업체 Q-centrix 지분을 스털링파트너스(Sterling Partners)로부터 사왔다.

    • 국내에선 PEF간 세컨더리 거래가 많지 않았다. 간혹 지오영, 대성산업가스 등 대형 세컨더리 거래가 있었지만 이는 당사자가 자금 출처가 다변화 한 글로벌 혹은 리즈널 펀드였기에 가능했다. 버거킹 M&A에선 인수자가 리즈널 펀드였다.

      산은캐피탈-JKL파트너스, 스카이레이크, 칼라일을 거쳐 한솔케미칼에 인수된 테이팩스 정도가 성공 사례로 꼽힌다. 작년부터 전진중공업, 한국자산평가 등 세컨더리 성격의 거래가 있었는데 모두 전략적투자자(SI)에 기대 성사됐다.

      LP군이 한정된 국내 사정상 국내 PEF가 다른 국내 PEF에 포트폴리오를 매각하면 핵심 LP는 자기 돈으로 앞서 PEF의 회수를 도와주게 된다. 스스로는 자산을 돌려막기 하는 형태라 실익이 크지 않고 반길 이유도 없었다. 운용사는 운용사대로 ‘더 먹을 것이 없다’는 인식 때문에 세컨더리 거래를 피했다.

      하지만 이런 기조가 점점 변할 것으로 보인다.

      수년째 유동성 잔치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기관 돈은 계속 풀리고 있다. 조단위 블라인드펀드를 꾸리는 것이 흔해졌다. 웬만하면 공동투자펀드(Co-investment Fund)를 결성하기 때문에 블라인드펀드 규모보다 몇 배나 큰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조단위 거래라도 돈을 못 모아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줄어들 전망이다.

      운용사들은 돈을 모으는 것 이상으로 큼직한 투자 대상을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 대기업들은 사는 것뿐 아니라 파는 데에서도 소극적이다. 공정거래법 위반 문제는 대부분 해소 단계에 접어 들어 기대 매물이 많지 않다. 내놓는 기업들은 ‘필요가 없어졌거나 망가진’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적극적 의사를 내비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운용사가 한 해 수십 건의 대상을 살펴도 한 두 건 투자를 성사시키기 어렵다. 4~5년의 투자 기간도 짧다. 매각자가 PEF라고 안 볼 여유가 없다. 한국에서 몇 차례 큰 성공을 거둔 글로벌·리즈널 펀드들도 드라이파우더를 소진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 블라인드펀드 운용사 대표는 "세컨더리 거래는 다른 PEF 손을 타서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이라는 점이 입증됐다고 볼 수도 있다"며 "내부통제시스템을 다시 갖추거나 PMI(인수후통합) 하는 데 큰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긍정적이다"고 말했다.

      LP들 역시 예전처럼 세컨더리 거래를 기피할 상황이 아니다. 대체투자 비중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자금을 풀어야 하는데, 마땅한 투자처가 많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한 대형 LP 관계자는 “갈수록 대체투자 분야에서 외부 운용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자산 돌려막기란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적당한 수익률을 낼 수 있다면 운용사의 세컨더리 투자를 안 좋게만 볼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세컨더리 거래 활성화 여부는 거부감을 제거하는 것보다는 새로 받아가는 PEF에도 수익이 기대되느냐 문제로 귀결될 것이란 지적이다.

      성장성이 있는 산업이라면 적당한 거래 배수에 투자해 쏠쏠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꾸준한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는 기업은 안정적인 배당으로 수익성을 보완하면 된다. 펀드 결성 초기에 투자했다면 여유롭게 보수를 챙길 수도 있다.

      M&A 자문사 관계자는 “국내 운용사들은 시장 개척이나 기술 개발보다는 비용을 절감하는 데 특화돼 있는데 우리 경제 전반이 침체하고 있어 성장성을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대형 PEF간 세컨더리 거래가 본격화 할텐데 누가 첫 주자로 나서 물꼬를 틀지 궁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