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분쟁…대기업에 손벌린 정부, 오락가락 '정책 리스크'
입력 2019.07.25 07:00|수정 2019.07.26 11:50
    기업들에 '부품소재 육성과 내재화' 목표로 제시
    대기업의 수직계열화와 사업확장은 그간 금기시
    외주ㆍ협업 중심인 글로벌 산업 트렌드와 배치
    대기업 정책 혼선으로 비춰져…한국기업 투자매력 저하
    • 우리나라와 일본의 무역분쟁,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로 시작된 양국 갈등은 지금 국내 대기업들이 처한 대내외 상황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국 경제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에 대한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우려가 대두되면서 정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간 ‘반(反)재벌’과 ‘반(反)대기업’으로 비춰진 정부의 정책 방향성이 180도 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 규제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30대 기업인들을 불러 소재 산업의 육성에 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동시에 대기업들에게는 '부품소재 육성과 내재화'라는 또 하나의 목표가 제시됐다. 일본 연립여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양국의 정치적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정부가 풀어내지 못한 외교적 갈등을 기업들이 해결해야 하는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이 같은 목표는 '외주'와 '협업'이 중심인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 마련된 기업들의 성장전략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대기업의 내부 확장을 꺼려온 정부 방침과도 궤를 달리한다. 얼마나 실효성 있는 목표인지가 불분명하다보니 이를 현실화시킬 구체적인 방안은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한 정부 내에서도 기업을 향한 정책기조가 또다시 바뀌는 상황만 연출됐다. 기업들의 장기 투자전략에 미칠 파급효과와 함께 한국 기업에 꼬리표처럼 붙어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고착화시킬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 정부에서는 재계와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및 이를 통한 사업확장은 사실상 금기시돼 왔다. 일감몰아주기 규제는 김상조 전 공정거래위원장 취임 이후 더 강력해졌고, 정부가 대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주요 그룹들은 대규모 투자 대신, 지배구조 개편을 대비해 자금줄을 꽉 쥐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대기업들의 인수·합병(M&A)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사업부를 떼내거나 슬림화해 주력 사업에만 집중하는 모습도 확연히 나타났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는 대기업들은 친(親)기업 성향을 보이는 해외로 눈을 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각종 세제혜택을 제공하며 글로벌 기업들을 유치하고 있는 미국만 보더라도 삼성전자와 현대차, CJ그룹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에 연일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정부 규제도 규제지만, 반도체·자동차·중공업·철강·조선 등 업종을 따질 것 없이 글로벌 산업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국내 기업들의 체질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상황을 조성했다. 국내 기업들은 해외진출과 더불어 글로벌 기업들과 손잡고 공동 기술 개발, 공급선과 판매처를 다변화하려는 노력을 이어왔다. 이는 급변하는 글로벌 사업환경 속에서 필수적인 생존 전략으로 선택됐다.

      사실 기초소재부터 완제품까지의 모든 공정을 일원화하기 위해선 대규모 투자도 필요할 뿐더러 업황부침에 따른 위험성을 감내해야 한다. 기술력을 갖춘 해외 기업들과의 협력과 외주를 통한 공급처 확보는 이런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해외 투자은행(IB) 관계자는 “그간 국내 주요 기업들이 자금이 부족해 소재산업 진출과 이에 따른 기술 내재화를 못했다기보다는 해외 기업과 협력관계를 맺고 공급선을 확보하는게 훨씬 효율적이란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한 글로벌 산업 생태계가 조성되면서 이익을 위해선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기업들의 철학도 보편화됐다. 한 때는 ‘쇳물부터 완성차까지’를 기조로 내세우며 자동차와 관련한 모든 기술을 내재화하려 했던 현대자동차그룹마저 글로벌 완성차 업체, IT 기업들과 손을 잡고 있다.

      하지만 이번 무역분쟁을 계기로 소재·부품산업 육성과 국산화가 다시 과제로 제시됐다. 이를 위한 투자 규모와 기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의 방침은 자칫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무엇보다 정부의 ‘현실 인식’이 기업들의 눈높이와 사뭇 달랐다.

      현재 기업들이 전후방 사업 강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 또는 M&A를 진행할 때면 '내부거래 확대'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지주회사 행위제한 요건은 강화하고 있는데 기업들이 무턱대고 투자를 진행하고, 자회사를 늘려가긴 어려운게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삼성전자를 보더라도 소재부품에 대한 직접 생산보단, 중소기업 소수지분 투자 등을 통한 간접적인 수요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품산업 육성과 내재화는 그간 '외주'로 방향을 잡았던 대기업들의 사업 전략을 수정,  '계열사 확대’ 또는 소재부터 완성제품에 이르기까지의 ‘수직계열화'로 다시 방향을 전환함을 의미했다. 이번 정부가 극도로 꺼려왔던 대기업의 ‘확장전략’과 배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현 정부에 들어 지배구조개편과 사업부 정리, 주력사업에 집중해 오던 기업들 입장에선 정부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정책에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요구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이를 통한 산업 생태계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엔 현실적인 제약이 아직 많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소기업 부품을 대기업에서 구매해 달라”고 주문했고,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중소벤처기업들이 부품과 소재산업의 독립선언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국내에서 사업을 이어가는 대기업들 입장에선 가장 이상적인 구조이지만, 단순히 중소기업들이 적당한 부품을 생산하고 대기업들이 이를 골라서 쓰는 수준으로는 현실화가 어려운게 사실이다.

      실제로 박영선 장관은 대한상의 포럼에서 “중소기업도 불화수소를 만들 수 있는데 대기업이 안 사준다”고 언급한 반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만들수 있겠지만, 품질의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정부의 ‘선언’과 기업의 ‘현실’ 간 괴리감을 명확히 느낄 수 있는 대목으로 비춰졌다.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핵심부품 설계와 생산을 위해서는 대기업 자금이 투자 형태로 중소기업까지 깊숙이 흘러들어가면서 중소기업의 활발한 R&D 활동과 우수한 품질의 부품을 유도해 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국내 대기업들은 벤처캐피탈(CVC)설립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투자 규제에 가로막혀 있는게 현실이다.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기업들을 대하는 정책 기조가 수시로 바뀌는 상황이 한국 기업들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강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한 때 ‘애플웨이(Apple Way)’를 따라가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시설·설비투자(CAPEX)를 줄이는 대신, 거래처 다변화와 경영 효율화, 이에 따라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는 유수의 글로벌 IT 기업들의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애플처럼 설비투자는 많이 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사업구조로 삼성을 변화시키겠다”는 이재용 부회장의 전략은, 정부의 일자리 창출과 고용확대 정책, 이를 위한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 주문에 정반대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지난해 향후 3년간 180조원의 투자와 4만명의 채용 계획을 발표했다. 이 부회장이 대통령과 경제부총리를 독대한 지 이틀만에 내놓은 결론이다. 비단 삼성그룹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현대차·SK·LG·롯데 등 대기업들은 어떤방식으로든 국내투자와 고용에 초점을 맞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외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매력적으로 바라볼 만한 요인들이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며 “성장성을 기대할 만한 산업군은 없는데 규제에 막힌 국내 기업들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기 때문에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이란 작은 시장을 굳이 중요한 투자처로 보지 않는게 현실이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은 한국 기업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기업들은 중장기 전략을 수정해야하고,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언제든 연출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은, 외국인들이 한국기업과 더 나아가 한국 산업과 금융 시장을 매력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이유로 꼽힌다.

      글로벌 IB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경제 정책만 보더라도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감정적 또는 이념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글로벌 투자자들 사이에선 ‘한국은 예측불가능한 나라’로 낙인 찍혀 있는 게 사실이다”며 “이미 한국 금융시장은 고립되는 과정이 아니라 고립된 상태인데 금융과 가장 밀접한 산업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미 외국인 투자자들은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에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는 사업과 투자 방향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기업에 대한 외부세력의 견제와 감시는 어느 기업이든, 언제든 재연될 수 있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해외투자자들의 눈높이에 걸맞는 사업방향과 투자를 집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해 지고있다.

      일관성 없는 정책과, 혼선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이 짊어져야 한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험난한 영업환경, 공격적인 재무정책, 규제 리스크 등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한국 기업들의 신용도 부담이 향후 12개월 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가뜩이나 거시경제 지표 둔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무역분쟁까지 겹치며 국내 기업들의 실적 저하는 이미 시작됐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