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가격 회복 지연은 韓정부탓?...1년 넘게 밀린 '턴어라운드'
입력 2019.11.27 07:00|수정 2019.11.29 09:21
    디램 가격 최근 한달 동안에도 5% 이상 추가 하락
    올해 2분기 저점이라더니 내년 3분기로 회복 미뤄져
    삼성전자, 공급 조절은커녕 연말 디램 추가 투자
    '경제 성과' 절실한 정부 눈치? 시장 심리에 영향
    • 국내 반도체 산업의 핵심품목인 디램(DRAM) 가격이 바닥을 모르고 하락하고 있다. 턴어라운드(업황 회복)를 기대하며 단기 급등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최근 뼈아픈 조정을 받고 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디램 가격 회복 지연의 배경으로 한국 정부를 꼽기도 한다. '경제 성과'가 절실한 정부가 경제성장률 방어를 위해 삼성전자에 기대고 있고, 이재용 부회장의 재심을 앞둔 삼성전자가 이에 부응하며 '조기·과잉 투자'가 이뤄진 게 지금의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22일 오전 디램익스체인지 현물(Spot) 거래가 기준 8기가바이트 디램 가격은 2.773달러로 전일 대비 마이너스(-) 0.72% 떨어졌다. 1주일 전 대비 1.56%, 1달 전 대비 5.68% 낮은 가격이다. 대량 공급시 적용되는 고정(Contract) 가격 역시 2.94달러로 사상 최저치 수준이다.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가 살아나면서 거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하지만, 여전히 수요 약세가 이어지며 거래가 부진하다는 평가다. 구매자들이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디램 가격이 역사상 최저가 수준인데다, 클라우드 게이밍·오버더톱(OTT;온라인 영상제공 서비스) 등 신규 서비스로 데이터센터 투자 수요가 커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 아직도 구매자들이 관망세라는 건 결국 가격이 더 떨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탓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하반기 상당수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들은 디램 가격이 올해 2분기 바닥을 지나 올해 3분기부터 본격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초만 해도 이런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막상 2분기가 되자, 8기가 디램 기준 6달러 선에서 움직이던 가격은 오히려 3달러대로 급락했다.

      지금은 가장 낙관적인 전망으로도 내년 1분기, 일반적으로는 내년 3분기를 디램 가격의 저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디램 가격 턴어라운드 시점이 올해 2분기에서 내년 3분기로 1년 이상 뒤로 밀린 것이다.

      오히려 그 사이 '바닥을 알 수 없다'던 낸드플래시 반도체의 가격은 바닥을 다지는 모양새다. 22일 낸드 64기가바이트 현물 거래가는 2.334달러로 전일대비 0.56% 상승했다. 1달 전과 비교해서는 0.65%가량 높은 수준이다. 아직 상승폭이 크지는 않지만, 고용량 제품에 대한 문의가 지속되고 있다는 평가다.

      디램 가격 부진의 이유는 무엇일까. 금융권에서는 '삼성전자로 인한 공급 부담'을 첫 손에 꼽는다. 삼성전자는 현재 5주~6주분의 디램 재고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 수준은 4주치다. 여전히 재고량이 평상시 이상으로 많은 것이다.

      메리츠종금증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여전히 높은 재고에도 비트(Bit)당 원가 축소를 위해 생산량을 크게 줄이지 않았고, 라인 효율화 이후 웨이퍼 투입량을 확대했다. 연말부터는 평택 1공장(P1)에 디램 추가 투자를 단행한다. 내년의 시장 성장에 발맞춰 선행 투자를 하겠다는 개념이지만, 시장에는 '삼성전자가 공급을 줄일 생각이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까지 17조원의 설비투자를 단행했다. 4분기에는 남은 12조원의 설비 투자가 진행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을 2%로 전망했는데, 이는 삼성전자가 12조원의 설비투자를 단행하는 것을 전제로 산출한 수치다.

      이 때문에 금융권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정부 코드를 맞추기 위해 디램 투자 일정을 앞당긴 게 아니겠느냐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삼성전자 사업장을 세 차례나 방문했다. 올해에만 두 번이다. 공식 행사장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만난 것은 아홉번이나 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총선과 차기 대선을 위해 경제 성과가 필요한 현 정부와 대법원의 환송 이후 재심을 앞둔 이재용 부회장의 이해관계는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며 "디램 부문 글로벌 1위 공급자인 삼성전자가 가격 폭락에도 추가 투자를 지속하는 이유로 이런 정치적 상황을 꼽는 시선이 꽤 많아졌다"고 말했다.

      물론 현 정부와 이 부회장의 재심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규제 성향이 강한 국내 법제도와 국내 정치권-기업 사이의 오랜 관계를 고려하면, 삼성전자 입장에서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정치적 안배'를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심리'다. 가격은 심리만으로도 움직인다. 원인이 어쨌든 삼성전자의 디램 재고가 충분히 줄어들지 않았고, 디램 추가 투자를 조기 집행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디램 가격이 하락세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디램 가격에 변곡점을 찍을 만한 '수요' 측면에서의 변화는 일러야 내년 하반기로 예상된다. 내년 3월 일본이 5세대(5G) 이동통신 상용화에 착수하고, 6월 미국이 5G 핵심 주파수인 3.5Ghz(기가헤르츠) 대역에 대한 경매를 완료하면 비디오 관련 데이터 트래픽이 급증하며 '제2차 데이터센터 투자 붐'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17일 5만3700원으로 고점을 찍은 뒤 21일 5만1000원으로 4거래일만에 5% 급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달 초에는 삼성전자 목표가를 6만원(액면분할 전 300만원)으로 제시하는 보고서가 쏟아져나왔다. 삼성전자는 액면분할 전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가 업황을 밝게 보고 목표주가를 300만원 이상으로 끌어올리면 어김없이 200만원대 후반을 단기 고점으로 주가가 무너지는 '300만원의 저주'에 시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