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분 줄인 한진칼, 경영권 분쟁은 심화
배당 확대 요구한 남양유업엔 사실상 두손
형사처벌 오너家 연임한다는데…슬그머니 발 뺀 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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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불붙었던 2018년 당시 국민연금은 중심에 있었다. 한진그룹 사태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국민연금의 방향성은 ‘적극적 주주권 행사’, 결국 기금의 수익률을 위해 주주로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의 몸풀기로 여겼던 지난해 주주총회 시즌이 끝나고 1년 후, 국민연금의 목소리는 오히려 작아졌다. 기업을 향한 칼날도 훨씬 무뎌졌다. 경영진과의 대화·주주서한 발송·사외이사 추천 등 주주권 행사에 대한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기업들마저 주주권 행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현재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구성을 추진 중이다. 지난달 국민연금 시행령 개정안이 공포·시행된 이후 마련된 후속 조치다. 수탁위는 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에 대해 ▲공개중점관리기업 선정 ▲공개서한 발송 등 공개활동 관련 사안 결정 ▲기금운용본부가 판단하기 곤란해 전문위에 결정을 요청한 사안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수탁위의 공백은 결국 어떤 기업에 어떠한 주주제안을 통해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논의할 기구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별도로 각각 9명으로 구성된 투자정책위원회, 위험관리·성과보상 전문위원회도 구성 중이다. 전문위원회가 최대한 빨리 구성된다 한들 조직이 정착돼 주총 전까지 실무적 성과를 낼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투자은행(IB)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기업에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각계 인사로 구성된 전문위원회 심의를 통해 다양한 근거와 명분을 쌓는게 중요하다”며 “주총 시즌이 불과 한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올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기대하기는 사실 어려운 상황인데, 일반 기관투자가들이 오히려 더 활발한 주주활동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대해 논의할 조직도,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추천하는 사외이사를 올해 주총 시즌에 찾아보긴 사실상 어렵게 됐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올해 주총 시즌부턴 사외이사 풀(POOL)을 구성해 주식을 보유한 일부 기업들에 사외이사를 추천하겠단 전략을 세웠다. 주주총회 6주 전까지 주주들은 주주제안을 할 권리를 갖지만, 현재 국민연금의 사외이사 추천은 한 건도 없는 상태다.
사실 국민연금이 지난해 적극적으로 나서 손을 댔던 기업들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은 오히려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도 하다. 한진그룹과 남양유업 등이 대표적이다.
한진그룹의 모체인 한진칼의 국민연금 지분율은 현재 2.5% 남짓. 지난해 7%가 넘는 지분율로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사실 미미한 수준이 됐다. 조원태 회장과 조현아 부사장 간 한진칼 경영권 분쟁은 지난해보다 훨씬 심화했다.
사실 국민연금이 한진칼보다 많은 지분을 보유한 곳은 대한항공이다. 한진칼의 경영권 분쟁은 곧 대한항공의 경영권 분쟁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대한항공의 경영 안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던 국민연금은 올해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올해 처음 열린 국민연금 기금위원회에서도 이 같은 우려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여전히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다.
남양유업에 대한 주주활동은 사실상 실패라는 평가를 받는다. 남양유업은 국민연금 공개중점관리기업 1호로 주주권 가이드라인 마련의 필요성을 전파할 때마다 거론된 단골 사례였다. 그러나 5년 간의 주주활동에도 불구하고 배당정책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고, 지난 1월 결국 관리기업에서 해제했다.
국민연금은 이달 초 주요 상장사 56곳의 주식 보유목적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변경했다. 일반투자로 분류된 기업에는 단순 투자성격을 넘어선 ‘주주권 행사’가 가능하다. ▲경영진 면담 ▲ 서한발송 ▲주주제안 ▲위법행위 임원에 대한 해임 청구 ▲정관 변경 등 주주로서 권리행사를 의미한다.
이중 삼성그룹(8곳), 현대차그룹(4곳), SK그룹(5곳), LG그룹(6곳), 롯데그룹(2곳) 등 절반 가량은 대기업 계열사로 채워져 있다. 국민연금 일반투자 목적 계열사들의 상황을 살펴볼 때 논쟁의 여지가 크지 않은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일반투자로 변경 공시하는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예상했던 기업이 제외된 경우도 있다. 효성 그룹이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은 효성의 지분 10%를 보유한 대주주다. 조현준 회장은 횡령과 배임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의 유죄를 선고받았고 그동안 국민연금의 스탠스를 고려하면 적극적 주주권 행사가 당연시 되는 기업 중 하나였다.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포기한 현재, 조 회장의 연임에는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경영권 분쟁, 배당정책 실패, 오너의 형사처벌 등 이슈가 집중된 기업에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모습을 볼 때 국민연금이 과연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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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2월 24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