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금융회사 성과보상제도까지 간섭하겠다는 정부
입력 2020.03.04 07:00|수정 2020.03.05 10:13
    올해 업무계획으로 'KPI 모범규준' 도입 검토
    금융사 경영전략의 '모든 것'인 KPI까지 관치
    소비자 보호 미흡한 금융사는 자연스레 도태돼
    시장경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 넘으려 해
    • 금융당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 하는 모습이다. '모범규준'을 통해 민간 금융회사의 성과보상체계(KPI)까지 직접 손 대겠다고 나선 것이다. '금융혁신'이라면서 방식은 구태의연한 모범규준의 형태를 또 다시 꺼내들었다.

      금융당국은 파생결합펀드(DLF)와 라임자산운용 사태 이후 쏟아지는 비판에 반전의 기회를 모색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의 '혁신'으로는 금융회사의 '후진화'만 이룰 수 있을 거란 평가가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2일 2020년 업무계획의 일환으로 '금융산업 혁신정책'을 내놨다. 금융회사에 플랫폼 비즈니스를 허용해 은행이 음식배달을 할 수 있고 보험사가 헬스케어앱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는 헤드라인이 미디어를 장식했지만, 정작 금융산업에 큰 영향을 줄 만한 내용은 따로 있었다.

      금융당국은 업무계획을 통해 '단기실적주의 해소를 위한 성과보상체계 개선안'을 2020년 중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큰 금융사고가 잇따랐던만큼, 장기적 관점의 리스크 관리 및 소비자 보호 경영이 가능하도록 개선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방식으로는 모범규준을 마련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모범규준에는 해외사례를 참고해 단기 재무지표 비중 제한, 장기 성과 반영비율 확대, 성과보수 공시 투명화 등의 내용을 담기로 했다.

      금융회사 경영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KPI에 직접 잣대를 들이대겠다는 의미다. 금융권에서는 벌써부터 '사실상 경영에 개입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범규준은 금융당국이 법적으로 규제할 근거가 없을 경우 빼드는 '전가의 보도' 역할을 해왔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지배구조법)이 국회에서 개정되기 전에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통해 최고경영자 승계 사전준비 및 이른바 '셀프 연임' 방지 시스템을 사실상 강제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모범규준은 '앞으로 이렇게 할거고 법적 근거는 없지만 어기면 불이익을 줄거야'라는 뜻과 다름 없다"며 "KPI는 인적 자원으로 움직이는 금융회사의 핵심 경영 전략인데, 획일적인 기준을 정부가 만들어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소홀하고 단기 성과에 매진하는 금융회사는 자연적으로 고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부침을 겪은 우리금융의 자산관리부문 이익은 지난해 4분기 770억여원으로 전 분기 대비 11.5%나 줄었다. 한 발 비켜서있던 외국계 은행들은 기회를 틈타 자산관리(WM) 고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고, 실제로 일부 성과를 냈다.

      국내 주요 금융회사들이 지난해 말 앞다퉈 신설한 소비자 보호 조직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능할지는 회사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소비자들의 체감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에 따라 고객 자산도 자연스럽게 이동할 것이다.

      이미 국내 금융시장은 은행만 해도 5대 대형금융지주 소속 은행과 3대 지방금융지주 소속 은행, 2곳의 인터넷은행 등으로 강한 경쟁구도가 형성돼있다. 경쟁을 통해 도태되는 은행이 나올 수 있는 구조다. 경쟁에서 뒤쳐지는 은행은 그만큼 상품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고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해서 성과를 보여주면 된다.

      정부가 앞장서 'KPI 기준을 주겠다'고 나서봐야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번에 금융당국이 내놓은 '혁신정책'에는 ▲과도한 지자체 금고 유치 경쟁 방지 ▲대형 보험대리점(GA) 판매채널 선진화 등 자율 경쟁체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신규 규제 정책이 담겼다.

      금융 인가 체제(라이선스) 세분화 등 그간 지속 추진해왔지만, 성과는 물음표인 정책도 지속 추진하겠다는 내용 역시 반영돼있다. 은행이나 보험사가 핀테크(금융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모든 스타트업을 뜻하는 '혁신창업기업'에 15%까지 투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등, '벤처업계에 은행 돈 풀기' 정책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혁신의 이름 하에 금융당국이 관치(官治)의 강도를 역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한 지적이 아니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올해 주요 금융지주 및 은행은 10년만의 역성장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우한 코로나 사태로 부실율이 치솟고 시장금리는 역대 최저를 경신하며 순이자마진(NIM)이 어디까지 떨어질 지 예측이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금은 정부가 민간 금융회사의 KPI에 손을 댈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