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기금은 모두 ‘반대’, 연금만 ‘찬성표’
적극적 주주권 행사 무색…주총 안건 무사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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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올해에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뒤늦게 수탁자책임위원회를 꾸려 주요 기업들에 대한 의결권 행사 여부를 결정했으나, 해외 투자자들의 시각과는 다소 차이가 큰 사안들이 발견됐다. ‘면죄부’로 비춰진 국민연금의 ‘찬성표’에 일부 기업의 오너와 전문경영인들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국민연금의 중점관리기업 중 하나였던 현대그린푸드는 올해 주총에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했다. 캐나다연기금(CPPIB)·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을 비롯해 의결권 행사 공시를 하는 해외 기관 중 4곳이 모두 재신임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주요 연기금 가운데 국민연금만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졌다.
현대그린푸드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37%, 외국인 7.9%였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사가 안건 통과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다만 국민연금이 지분 12.8%를 보유하고 있어 안건 통과 여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GS그룹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허태수 GS그룹 회장과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은 외국인 투자가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각 ㈜GS와 GS건설 사내이사에 무난히 선임됐다. 역시 주요 연기금 가운데 국민연금만 찬성표를 행사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투자공사(BCI)는 허창수 명예회장의 사내이사 선임과 관련해 “독립적이지 않은 이사가 이사회 주요 멤버로 참여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We are not supportive of non-independent directors sitting on key board committees)”고 밝혔고, 플로리다연금(SBA Florida)은 “이사추천위원회의 독립성이 부족하다고 판단(Insufficient nominating committee independence requirement)한다”며 반대 이유를 밝혔다.
국민연금에 힘입은 현대차그룹도 정의선 부회장 체제 구축에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는 올해 주총에서 정의선 부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건을 상정했다. 해외 주요 연기금 대부분이 정 부회장의 연임에 반대한 반면, 국민연금만 주요 연기금 가운데 유일하게 찬성표를 행사했다. 국민연금의 현대모비스 지분율은 11%로 상당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플로리다연금(SBA Florida)은 '과도한 겸직'을 이유로 들어 정 부회장의 현대모비스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했다. 캐나다 온타리오교직원연금(OTTP)은 "OTTP는 이사회에 “여성 이사의 수가 부족하다(OPPT will typically not support a board member(s) when we determine there is an insufficient number of women on the board)”고 지적했고, 브리티시컬럼비아주투자공사(BCI)는 “이사회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failing to ensure that all key board committees are fully independent)”며 정 부회장 연임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오너일가 뿐 아니라, 전문경영진의 사내이사 선임·재신임 안건에서도 해외 연기금과 국민연금의 입장이 엇갈린 사례가 많았다. SK㈜·SK하이닉스·SK텔레콤·포스코·셀트리온·현대위아·NH투자증권 등이 대표적이었다. 사외이사 선임 안건까지 확장하면, 이 같은 사례는 훨씬 늘어났다. 현대차(최은수 사외이사), 기아차(김덕중 사외이사), 현대글로비스(김준규 사외이사) 등이 국민연금과 해외기관의 의결권 행사 방향이 엇갈린 사례가 됐다.
투자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모든 기업들의 안건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의결권을 행사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며 “연금이 주요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다수의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고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기업의 안건들에 대해선 명확한 근거를 마련해 보다 신중하게 의결권을 행사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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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올해 3월 정기주총은 연 기업 228곳 가운데 약 53곳에 대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다. 과거에 비해 반대 의결권 행사 비중은 높아졌으나, 국민연금의 의사가 반영된 결과는 올해 주총 시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채용비리 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 모두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신임에 성공했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조현상 효성 사장도 선임 요건을 무난히 채웠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정치적 행위로 비쳐지지 않기 위해선 보다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투명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공개되야 한다”며 “대기업들의 주요 주주로서 적극적인 주주권을 검토 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인력과 조직을 마련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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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4월 02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