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대기업 한도대출 받기 위해 은행 줄서
은행 대기업 담당자들 앉아서 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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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이후 20년 만에 은행과 대기업의 갑-을 관계가 바뀌었네요" (한 시중은행 대출 담당자)
대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혈안이 되며 너도 나도 은행문을 두들기고 있다. 회사를 찾아가도 문전박대 당하던 은행 대기업 영업 담당자들은 요즘은 자리에 앉아서 대기업 재무팀을 맞이하고 있다. 경기침체가 절벽처럼 코 앞에 다가오자 금융권과 기업 사이의 풍속도가 달라진 것이다.
기업대출은 4월 이후 사상 최대규모로 증가하고 있다. 4월 중에만 대기업대출은 운전자금 수요와 회사채 기업어음 상환자금 마련 등으로 11조2000억원이 증가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대기업들 모두 현금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들이 대출까지 받아가며 현금확보에 나서는 이유는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가 올 것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대부분 한도 대출로 ‘마이너스 통장’처럼 한도를 받아서 현금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당장 현금이 필요해서라기 보단 기업의 유동성 위기가 일시적으로 생길 경우 크레딧 라인이 막힐 수 있어, 이를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대기업들 대부분은 이렇게 받아 놓은 대출을 다시금 예금에 넣어 놓고 있다.
대기업 대출이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늘면서 은행의 대기업 영업 담당 부서는 신이 났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잘 만나주지도 않던 재무담당자들이 이제는 서로 찾아와서 한도대출 문의뿐만 아니라 대출 규모를 상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 은행 대기업 담당자는 “4월 이후부터 대기업들의 현금 수요가 크게 늘면서 관련한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라며 “비단 대기업뿐만 아니라 현금이 필요한 금융기관들에서도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은행에선 IMF 이후 20년만에 찾아온 변화라고 입을 모은다.
IMF에서 회복한 이후 2000년대 들어 대기업들의 현금잔고는 큰 폭으로 늘었다. 삼성을 비롯한 주요 4대 대기업 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회사규모뿐만 아니라 현금창출력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회사채 시장의 성장과 함께 이들 대기업의 은행 의존도는 크게 줄어들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변화의 기미가 감지되긴 했다. 대기업의 수익성 성장폭이 점점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 적극적으로 글로벌 M&A 등 사업확장에 나서면서 보유 현금은 줄고 차입이 늘어났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SK그룹만 하더라도 전 그룹계열사가 보유한 현금성자산은 지난해 13조7000억원으로 2018년 대비 4조원 가량 줄었다. 반면 순차입금은 33조원으로 2018년 14조원에서 두배 이상 증가했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19로 글로벌 경기침체가 현실화하자 콧대 높던 대기업 자금 담당자들도 앞다퉈 은행 문턱을 드나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크로스보더 M&A 등을 진행하면서 대기업들의 재무여건이 이전보다 악화했다”라며 “SK그룹 같은 대기업들도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생각에 한도대출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산매각에 나서고 있다”라고 말했다.
은행원들의 목에 힘이 들어갔지만, 이전과는 다른 고충도 생겼다. 은행 입장에선 대기업들이 요구하는 대출을 모두 실행해 줄 수 없다 보니 선별적으로 대출에 나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여 이럴때 대기업을 상대로 갑질 했다가 서로간의 감정에 골이 생길 수 있는 것도 우려하고 있다. 이전의 고민이 어떻게 대기업 대출 고객을 확보 하느냐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대출을 대기업에 분배하느냐로 바뀐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럴 때일수록 대기업 고객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라며 “너도 나도 대출해 달라는 시기라서 은행장들도 대기업 고객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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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5월 24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