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한 사이에 껴 투자계획 골머리
미국 대선에 맞춰 다가오는 결단의 시간
이재용 부회장은 승계 이슈에 발 묶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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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간의 ‘고래싸움’에 삼성전자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어느쪽을 선택하든 제로섬 게임이다. 결단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지만 오너 경영인인 이재용 부회장은 국내에서 승계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고 정부의 국내 투자 압박도 받고 있다. 말 그대로 한국-미국-중국의 트라이앵글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페이스북, 앤비디아 등 내로라하는 IT기업들이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M&A에 나섰다. 애플은 가상현실 콘텐츠 강화를 위해 넥스트VR이란 회사를, MS는 클라우드 서비스 강화를 위해 어펌드네트웍스를, 페이스북은 인도의 4G 이동통신회사인 지오를 인수했다. 반도체 회사인 인텔과 앤비디아는 데이터와 로보택시 업체를 각각 인수했다.
삼성전자는 아직까지 조용하다. 주저하는 사이 쌓아놓은 현금은 매년 10조원씩 불어나고 있다. 지난해 현금성자산만 105조원에 이른다. 이에 반해 매출은 2018년을 정점으로 꺾였다. 올해 매출액은 2013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처럼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어떠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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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점은 미중 관계 악화다. 미국 정부는 자국 기술을 활용해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가 반도체 제품을 중국 화웨이에 공급하기 위해선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실상 화웨이와 대만 TSMC의 관계를 끊기 위한 제재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화웨이는 삼성전자가 TSMC의 역할을 대신해 주길 요구하고 있다. TSMC는 그간 화웨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시스템 반도체 등의 위탁생산(파운드리)을 담당해왔다.
삼성전자로선 화웨이의 손을 잡기도 뿌리치기도 쉽지 않다.
화웨이의 손을 잡자니 미국의 압박이 거세질 수 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반(反)화웨이 전선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당장 삼성전자의 화웨이향(向) 메모리 반도체 수출까지는 막지 않겠다고 했으나, 이미 미국은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의 메모리 반도체 중국 수출을 막은 전례가 있다. 상황이 더욱 악화하면 메모리 반도체 제재도 충분히 거론될 수 있는 카드다.
삼성그룹 내에서도 미국 반도체 공장 증설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공장 증설이 반화웨이 노선 참여의 신호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부터 삼성전자 미국공장 증설을 위한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회사 측에선 검토한 바 없다는 입장이지만 삼성그룹 건설 계열사들에 미국 공장 증설을 위한 예상가격을 의뢰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그룹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미국 공장 증설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일부 건설 계열사들에서 나왔다”라며 “TSMC의 미국 공장증설로 삼성전자도 이제는 미국 투자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 아닌가 한다”라고 말했다.
투자자들도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의 삼성전자 투자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하반기에는 미국 투자 방향성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삼성전자가 일방적으로 미국을 택하면 그 대가가 크다는 점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부랴부랴 중국 시안공장을 방문한 것도 중국의 커다란 내수 시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반화웨이 노선 참여는 제2의 사드 사태를 불러올 것리안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만큼이나 중국의 압박도 거세질 공산이 크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삼성이 중국을 외면하긴 힘들다”라며 “그렇다고 미국을 등지면 반도체 부품업체 제재를 통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자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라고 말했다.
국내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다. 승계 문제와 관련해 검찰의 칼은 이재용 부회장을 향하고 있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승계문제의 핵심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문제를 다루면서 삼성그룹은 이 문제를 방어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국내 대기업 중에서 자금적으로 그래도 여유가 있는 곳이 삼성전자이다 보니 정부의 투자요구에도 직면해 있다. 이를 외면하고 미국이나 중국 한쪽의 투자만을 강행한다면 국내 여론 악화뿐만 아니라 정치권의 비판, 향후 재판과 검찰수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더라도 그 파장이 크다는 점에서 결단을 미루고 싶겠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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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6월 0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