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선장' 産銀의 브리핑, 보장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입력 2020.06.18 07:00|수정 2020.06.17 18:23
    • 이동걸 회장은 산업은행의 신산업 육성 역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해왔다. 하지만 경제 위기 속에선 구조조정 외의 역할이 주목받기는 어렵다. 정부도 시장도 믿을 구석은 산업은행 뿐인데 정작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소극적이다.

      17일에 있었던 산업은행의 온라인 브리핑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나항공·두산중공업·대한항공·기간산업안정기금·대우조선해양 등 5가지 주제를 다뤘다. 대외적 관심이 급증하는 이슈에 대해 실무 부서의 답변을 듣겠다는 취지였지만 핵심 내용은 빠졌다. 대부분 알려진 내용을 다시 언급하거나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나항공에 관련해선 HDC현대산업개발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 HDC현산이 일단 인수를 확정하면 코로나 등 환경을 감안해 조건 변경을 검토하겠지만 아직 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받지 못했다"는 HDC현산의 주장에 대해선 추가 입장 자료를 내 조목조목 반박했다. 특히 이동걸 회장은 HDC현산의 서면 협상 요구에 대해 "60년대에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편지지로 이야기 하느냐"며 날선 반응을 보였다.

      산업은행의 격앙된 반응이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HDC현산은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실적 보고를 꾸준히 받아왔다. 한창수 아시아나항공 사장이 HDC현산을 직접 찾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HDC현산이 눈가리고 아웅식 대응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렇다고 산업은행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금호그룹의 재무 위기를 타개할 방책으로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밀어붙인 것은 산업은행이다. 코로나 이후에도 타격에 대응할 시간이 몇 개월이나 있었지만 허송세월했고 결국 볼썽 사나운 여론전으로 이어졌다. 해결책 제시를 미루다가 10년 이상 기업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던 과거의 사례를 답습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HDC현산의 인수 의지를 믿는다면서도 "거래 무산시의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혀야 하는 처지다.

      다른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진 않았다. 대부분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거나 일반론을 제시하는 데 그친 모습이다.

      대우조선해양 M&A도 성사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시아나항공처럼 산업은행이 기획해 시작된 거래다. 세계 조선 1·2위 기업이 합쳐지는 것이니 기업결합 난항이 충분히 예상됐으나 대비책은 충분치 않았다. 이날 브리핑에선 "과거 사례를 보니 조건부라도 승인은 받더라"는 기대섞인 언급만 있었다.

      산업은행은 해외에서 기업결합 승인을 받지 못한다면 M&A가 실패하게 된다고 했다. 매각 실패 시 대우조선해양이 채권단 추가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우조선해양은 1년 이상 거래 종결의 불확실성 속에 노출되며 영업력 손실을 입었다. 자초하지 않은 실패의 책임도 결국 기업 스스로 져야 하는 셈이다.

      두산그룹 지원의 당위성은 이번 설명회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두산중공업이 국가 전력관리 시스템의 중추니 살려야 팔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지원 과정에 그룹 오너의 실책은 가려졌고, 지원의 반대 급부도 명확하지 않다. 산업은행은 그룹이 실행할 자구안, 즉 자산 매각이 시장에 알려져서 득이 될 것이 없으며 지원금 규모를 따져보면 대강 추론이 가능할 것이란 입장이다.

      아울러 두산그룹의 자산 매각을 채권단이 강제할 수 없고 실익도 없다고 설명했다. 법률적으로는 이치에 맞다. 그러나 앞서 기업들 사례만 봐도 채권단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지금까지 두산그룹의 위기를 넘기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산업은행이다. 하물며 막대한 자금을 또 집어넣는 상황이라 어떤 제한을 정하지 않는 것이 외려 상식적이지 않다. 시장에선 두산솔루스 매각이 어느 시점까지 이뤄지지 않으면 채권단이 매각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이라 보는 시각이 많다.

      비슷한 시기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은 대한항공의 상황도 두산중공업과 닮았다. 시장은 국영화 가능성까지 점치는데 산업은행은 대한항공과 맺은 특별약정에 대해서도 사정상 알리기 어렵다고 했다. 이미 공시로 밝힌 유상증자 계획 정도를 언급했고, 사업부 매각은 컨설팅 결과를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송현동 부지 매각에 대해선 지연되더라도 다른 대안이 있다고 밝혔다. 수천억원의 유동성을 뚝딱 만들어낼 상황이라면 애초에 위기를 맞지 않았어야 하는 것 아닌지 의문이다.

      산업은행의 기간산업안정기금 활용 방안도 여전히 안갯속이다. 저비용항공사(LCC)들은 지원 대상 업종이고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음에도 기안기금 지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기안기금보다 다른 지원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산업은행의 입장이다. 쌍용자동차에 대해선 책임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회사의 지속가능성이 확인돼야 한다는 그간의 '구조조정 원칙론'을 재확인했다. 쌍용차 입장에선 산업은행이 기존의 자금을 회수하지 않겠다고 한 정도가 희망적인 부분이다.

      물론 기안기금은 산업은행 주도로 운영되지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면도 있다. 정부 뜻에 따른 기구고 산업은행은 손만 빌려주는 형태다. 정부조차 일부 산업에 대해 지원할 수 없다 했다가 검토해보겠다는 등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다. 기금 안에서도 벌써부터 "지원 원칙은 있지만 정부 뜻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니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의 방향성도 모호한 상황이다. 과거엔 조선·해운·건설 등 특정 산업에만 집중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업종이나 규모를 불문하고 위기 기업이 쏟아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어느 산업을 어떻게 살리고 정리할 것인지 명시적인 답을 내지 않고 있다. 형평성을 따져야 하고 일자리 걱정도 크다.

      정부가 이럴진대 산업은행이 앞장서 책임질 일을 만들리 만무하다. 산업은행은 HDC현산의 공개 여론전에 대응할 한 장짜리 보도자료를 다듬고 깎는 데만 꼬박 하루를 들였다. 그만큼 공격받고 책임질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썼다. 앞으로도 산업은행의 책임있고 진취적인 목소리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