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수년째 위기 가속화…사실상 문책성 평가
이동우 하이마트 대표, 실적 힘입어 지주 대표 선임
자리에 성역 없다 경종…임원 실적개선 압박 커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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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각규 롯데지주 대표(부회장)가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룹 임원진도 축소되거나 물갈이가 이뤄졌다. 이례적으로 연중에 고위직 인사를 단행한 것은 그만큼 롯데그룹이 느끼는 위기감이 컸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흔들린 롯데그룹은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며 부진이 길어지고 있다. 황 부회장의 사임도 신동빈 회장의 문책 성격이 짙다. 회장의 복심도 위기엔 자리를 보전하지 못했다. 앞으로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의 실적 개선 부담도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13일 롯데그룹은 롯데지주 및 계열사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황각규 부회장 대표이사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사회 의장 역할은 계속 맡기로 했다. 이동우 롯데하이마트 대표가 새로 롯데지주 대표로 정해졌다. 작년말부터 황 부회장과 롯데지주를 이끌어 온 송용덕 부회장은 유임됐다. 연중에 대규모 인사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이달 들어 조짐이 있었다. 임원들은 이미 지난주부터 인사 내용을 통보받고 움직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은 이번 인사에 대해 위기 상황에서 혁신과 변화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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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각규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이 후계자 수업을 받을 때부터 수십년간 지근거리서 신 회장을 보좌한 최측근 인사다. 2015년 신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확실히 쥔 이후 그룹 내 입지가 확고해졌고, 신 회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도 그룹을 이끌었다. 롯데그룹의 대표적인 M&A 전문가로서 롯데렌탈 인수, 삼성그룹과의 빅딜 등을 주도하며 그룹 성장을 이끌었다.
황각규 부회장은 그룹 2인자로 올라선 후엔 매번 신동빈 회장의 재신임을 받았지만 작년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롯데그룹은 작년말 인사에서 계열사 22곳의 대표 또는 사업부장을 교체했다. 송용덕 부회장이 부상하며 신동빈 회장과 황각규 부회장의 투톱 체제가 삼각 체제로 바뀐 것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황 부회장의 입지가 예전같지 않다는 평가와 함께 올해말 정기 인사 때는 물러날 것이란 예상이 있었는데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이번 인사는 황각규 부회장의 ‘용퇴’ 형태로 이뤄졌지만 사실상 문책성 조치라는 시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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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은 핵심 사업들이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7년 이후 중국이 사드 보복을 시작한 후 조금씩 흔들렸다. 중국 내 사업이 어려워졌고 애써 키운 사업을 헐값에 팔고 철수해야 했다. 일본과 무역 분쟁이 불거진 뒤엔 친일본 기업이라는 꼬리표에 시달렸다. 신동빈 회장의 애착이 큰 롯데케미칼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작년부터 미국-이란 갈등의 타격을 입고 있는데 올해는 대산공장 화재로 가동이 멈추기도 했다.
올해는 코로나까지 겹치며 실적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핵심인 롯데쇼핑과 롯데케미칼의 2분기 영업이익이 각각 14억원, 329억원에 그쳤다. 여론 악화 부담을 감수하고 롯데마트 구조조정 카드를 앞당겨 꺼내들었다. 기대를 걸었던 통합쇼핑몰 롯데온의 성과까지 썩 신통치 않다. 잘 합치기만 해도 압도적인 1위가 될 것이란 예상은 현재로선 빗나갔다. 유통 계열사 내부에서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조소가 나올 정도다.
사정이 이러니 그룹의 머리인 지주, 그 중에서도 수뇌부의 책임론이 부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장보다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중요한 롯데그룹 상황에선 ‘전략 라인’에 힘을 싣기 어려워졌다. 그 최고 책임자인 황각규 부회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작년 대규모 인사에도 달라지는 모습이 없다보니 신동빈 회장이 다급하게 충격요법을 꺼냈을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실제 이번 인사에선 전략 라인의 힘이 빠졌다. 전략보다 혁신으로 무게추가 옮겨간 모양새다. 경영전략실이 경영혁신실로 개편됐다. 윤종민 롯데지주 경영전략실장(사장)은 롯데인재개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영전략실 산하 경영전략 1~3팀의 팀장도 모두 롯데렌탈, 롯데케미칼 등 계열사로 내려갔다. 그룹의 머리가 무거운 것보다 계열사로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훈기 롯데렌탈 대표는 롯데지주 경영혁신실장으로 이동하고, 호텔롯데와 롯데케미칼 일부 임원도 혁신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동우 롯데하이마트 대표의 부상이 눈에 띈다. 하이마트는 올해 노조위원장에 징계를 내리며 부당 노동행위 논란이 일었다. ‘뉴롯데’의 이미지에 해가 되다보니 이 대표의 입지가 위태로워진 것 아니냔 시선도 있었지만 삼각구도에 끼게 됐다. 죽을 쑤는 계열사들 사이에서 그나마 성과를 낸 것이 높게 평가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도 실적 성과가 경영진과 임원들의 유임을 결정하는 핵심 지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인사로 회장의 복심도 언제든 물러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줄을 잘 서 계열사를 옮겨다니며 임원 자리를 지키는 인사들도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실적을 내지 못하면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워졌다. 황각규 부회장의 측근 인사들도 작년 인사에서 많이 밀려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 사정에 밝은 IB 업계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이 지주 임원들이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잘 될 거라고 하는 사이 사업이 망가졌다고 생각해 굉장히 화가 많이 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인사로 이제는 누구도 자리를 안심하기 어려워졌고 자리 욕심으로 파벌을 만드는 것도 무의미해졌다”며 “신 회장이 경종을 울렸기 때문에 앞으로 임원들은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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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8월 13일 17:45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