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CVC에 '엔젤' 되라는 정부, 인력·시간 제반에는 '회의론'
입력 2020.08.21 07:00|수정 2020.08.24 09:26
    정부 기조 맞출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 있지만
    인력·시간 제반 갖추지 못했다는 '회의론' 있어
    • [편집자주]정부가 대기업의 CVC 보유를 허용했다. 국내 벤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시장에선 실효성을 두고 의문을 표시한다. 대기업 입장에선 개정안 내용이 지주사에 부담을 줄 수 있어 설립 효용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벤처업계에선 경험이 부족한 대기업이 CVC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 대기업 CVC가 벤처투자 활성화의 최우선 과제일까?

      대기업 일반지주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제한적 허용을 두고 이해관계자들의 생각은 제각각이다.

      기존의 벤처캐피탈 업체들은 대기업이 벤처투자시장을 키워줄 거란 기대감을 보이면서도 먹거리 뺏길까 내심 불안한 기색이다. 한 VC업체 투자심사역은 "CVC가 대거 유입되면 벤처시장이 더 활성화할 거란 기대감은 있다. 하지만 규모와 자금력에 있어서 대기업을 이기기 어렵다 보니 딜(Deal) 소싱이나 LP(대형 기관투자가) 투자금 유치 등 밥그릇을 뺏길 수 있단 생각이 없진 않다"는 입장이다.

      롯데·CJ·IMM인베스트먼트·코오롱·농협 등 CVC 조직이 있지만 지주사 바깥에 두고 있는 기업들은 지주사 산하로 CVC 지분구조를 바꾸기엔 부담이다. 한 CVC 관계자는 "외부자금도 40%까지만 허용되고 계열사 편입기간도 10년이나 기다려야 한다. 지주사 밑으로 옮길 유인이 부족하다. 지금처럼 지주보다는 투자에 적합한 계열 법인이 들고 있는 게 취지와도 더 맞다고 본다"라고 전했다.

      지주체제지만 CVC 조직이 없는 기업은 정부가 나서서 기업에 벤처투자를 종용하는 모습이 달갑지 않다. 이들 기업은 정부 사업에 발맞춰간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벤처투자 시장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

      CVC를 갖췄지만 지주회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기업에는 상대적으로 촉각을 다투는 이슈가 아니다. 대체로 벤처시장 활성화에 따라 소싱 기회가 넓어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는 정도다.

      벤처투자시장이 규모를 키울수록 혜택을 입을 곳은 수많은 벤처·스타트업들이다. 하지만 CVC로부터 투자를 받으면 출자자 현황과 투자내역, 자금대차관계, 특수관계인 거래내역을 감독당국에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하는 점은 꺼려진다.

    • 이해관계자마다 부담감과 우려 요소도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모험자본 육성을 장려하는 정부의 기조에 발맞출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이미 닻이 올려진 상황에서 이제 시장의 관심은 '대기업 일반지주사 CVC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정부는 정책 효과를 입증할 수 있을지'로 옮겨오고 있다.

      정부는 대기업이 액셀러레이터 혹은 엔젤 투자자를 자처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인력 제반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가 다수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운용 인력이다. 국민연금, 한국벤처투자, 정책금융공사 등 벤처투자 주요 출자자들은 위탁운용사 선정 관리에 있어 투자 인력 관련 항목을 우선시한다. 외부에서 유능한 심사역을 영입해 올 필요가 있지만 VC업계 내에선 CVC 조직에 대한 회의론이 있다.

      최근 공식 출범한 신세계그룹의 첫 VC 자회사 '시그나이트파트너스'도 투자 인력 영입에 어려움을 겪어 조직 구성에 난항을 겪었다. 독립계VC 위주로 영입을 시도했지만 반려 사례가 많았다. 당시 영입을 제안 받았던 한 독립계VC 투자심사역은 "대기업 투자 문화가 자유롭지만은 않다보니 이적 제안에 그리 마음이 동하지 않아 거절했다"는 설명이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역시 ‘시간’이다. CVC는 VC와 비교해 조직의 생리나 규모에 차이가 있어 벤처투자 또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면이 있다. 투자기업을 계열사로 편입하기까지 기존 7년에서 10년으로 늘렸다는 내용도 이번 개정안에 포함돼 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사내는 물론 투자자 입장에서 마냥 기다려주기 어렵다.

      대기업 벤처투자에 정통한 한 로펌 변호사는 "VC나 액셀러레이터 쪽은 스타트업 투자가 익숙하기도 하고 서로 생리를 잘 알아 결정이 빠른 편이지만 기업형 VC는 IR(기업설명회)도 통해야 하고 수많은 실무진을 거쳐야 해 딜 클로징까지 최소 8개월 이상 소요된다. 결정을 다 해놓고는 막판에 엎어버리는 경우도 많다"라고 전했다.

      이어 "대기업은 통상 대규모로 투자를 하다 보니 스타트업에 원하는 게 많고, 스타트업은 '왜 우리가 투자자에게 이런 것까지 해줘야 하느냐'는 인식차가 좀 있다. 시너지가 잘 날 투자도 많지만 계열사로 편입하거나 투자금을 최종 회수하는 데에도 시간이 더 소요된다는 점은 약점"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초기 투자보다는 중·후기 투자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짤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이는 대기업 CVC를 엑셀러레이터와 엔젤투자자로 육성하려는 정부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대기업 특성상 성공기준이 일반적인 VC와 비교해 보다 엄격한 점도 비슷한 맥락에서 우려 요소로 언급된다. VC업계 관계자는 "성공기준이 일반적인 VC보다 팍팍할 대기업들은 리스크가 큰 초기 투자에 들어가는 것을 꺼릴 수 있다. 결국 이런 구조에선 엔젤 투자자나 액셀러레이터가 나오기 쉽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4대 그룹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은 여건상 더 쉽지 않을 거란 평도 나온다. 한 증권사 지주 담당 연구원은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그룹은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특히 투자형 지주회사로 꼽히는 SK㈜의 역할이 주목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주사가 스스로 수익을 내기 어려워 자기 자본금만으로는 설립이 어렵다. CVC는 결코 쉬운 선택지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투자 성공보다 실패 사례가 다수일 경우 책임론이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재계 관계자는 “아무리 인력 구성을 VC업계 출신들로 짠다 하더라도 투자 성공보다 실패 사례가 더 많이 나온다면 결국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는 대기업 차원의 문제로 회귀할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이 경우 감독당국 또한 책임 소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일반지주회사의 CVC 제한적 보유' 추진방안 보도자료를 통해 구글 등 글로벌 대기업의 벤처투자 사례를 언급한 바 있다. "전체 VC 투자 중 글로벌 CVC의 투자금액의 비중은 25% 수준"이라며 국내 대기업의 투자 참여를 장려했다. 하지만 구글 등 글로벌 기업은 외부 출자 조달에 제한이 없다.

      관계자는 "추후 지주사 CVC 활동이 본격화하면 각 정부부처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내부적으로 충분히 합의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글로벌 기업과 단순 비교 이전에 취지를 살리려면 어떤 게 더 필요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