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플랫폼·신재생·바이오…'BBIG' 열풍에 올라탄 기업들
입력 2020.09.24 07:00|수정 2020.09.25 10:02
    직원 80명 회사에 사업목적만 200개
    발전 보조설비 회사는 돌연 신약개발 선언
    일단 정관변경 신사업 명분화부터
    단기 주가 부양, 투자자 유치 꼼수 지적도
    • 최근 들어 이른바 BBIG(바이오·배터리·인터넷·게임)의 열풍에 올라타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투자자들이 급격하게 몰리기 시작한 바이오 산업, 정부의 뉴딜 펀드 결성에 힘을 받는 디지털·친환경·신재생 산업 등 최근 들어 주목 받는 사업군을 신사업에 추가하는 형태다.

      본업과는 거리가 먼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선언한 기업들도 상당히 눈에 띈다. 정책적 수혜 그리고 향후 투자자 유치에 보다 보탬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기업들이 앞다퉈 사업 방향성을 트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초 정기주주총회 시즌엔 정관변경 안건을 상정한 245곳의 상장사 중 약 40%가 사업의 목적을 변경했다. 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선 정관에 사업목적을 추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대표적으로 그룹 계열사들은 미래 모빌리티 사업,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 등을 정관에 추가했다. 이 외에도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사업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는 사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사업의 목적을 수십가지, 많게는 100가지 이상 추가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올해 하반기 들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기업 중 주주총회를 연 기업은 약 70곳이다. 이 가운데 약 10곳 이상이 정관변경을 통해 사업목적을 추가하거나 변경했다. 같은 기간 코스닥 시장에선 약 160곳이 주주총회를 개최했고, 4곳 중 1곳이 정관에 사업목적을 추가했다.

      최근 주주총회를 연 기업들이 사업목적에 추가한 항목들은 ▲모바일 콘텐츠 ▲자동차용 및 에너지 저장용 배터리 ▲폐기물 ▲태양광발전 ▲의약품 ▲헬스케어 ▲인공지능 ▲신재생에너지 ▲신약개발 등 이제 막 주목 받기 시작한 사업군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사업년도 중간에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사업목적을 변경하거나 추가하는 사례는 일반적이지 않다. 정관 변경은 상법상 주주총회 특별결의(참석주주의 66.7%)를 거쳐야 하는 안건이기 때문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한 보통결의보다 까다롭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주주들이 모이는 연 1회 정기주주총회에서 재무제표 승인, 이사선임, 정관변경 안건을 동시에 의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장 기업들이 사업 목적을 앞다퉈 추가하는 데는 급격히 늘어난 시장의 유동성을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평가다. 기존 주력 사업만으론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기 쉽지 않고, 또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인도 적다 보니 일단 신사업 추진이란 타이틀을 앞세운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신약개발 및 의약품 제조 등 바이오 산업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자 수요를 이끌어 냈다. 기관투자가는 물론 개인투자자들의 투자도 크게 늘면서 바이오 섹터에 묶인 기업들의 가치는 성장했다.

      또한 정부가 최근 뉴딜펀드 결성을 추진 하며 ‘디지털’과 ‘그린’이란 키워드를 제시함에 따라 IT·플랫폼·인공지능·신재생 에너지 분야도 재조명 받았다. 과거 IT 버블 때와 유사하게 해당 분야와 연결고리가 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수직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업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실제 추진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업들이 주가 부양과 투자자 유치만을 목적으로 사업 확장을 내세우는 사례가 나타나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기업이 추진하는 사업 목적의 개수와 범위 등은 규제 대상이 아니다.

      실제로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A기업(정밀기기 제조업)은 올해 주주총회에서 175개의 항목을 사업목적에 추가했다. 종전의 사업 목적은 40개였으나 이번 주총을 통해 200개가 넘는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2차전지 제조, 인공지능(AI)·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제품 개발, 바이오 의약품 관련 연구, 반도체 설계 용역 등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한 사업군은 물론 대부업·숙박업 까지 사업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졌다. 해당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350억원, 직원수는 80명에 불과하다. 반대의 예로 삼성전자의 사업목적은 29개, 현대차는 32개이다.

      코스닥 상장사 B기업은 올해 중순 주주총회를 열고 바이오 신약 연구 개발, 백신·진단시약·바이오센서의 개발, 원격진료 및 AI 의료 시스템 개발 등 15가지 항목을 정관에 추가했다. 회사의 주력은 국내 발전소에 보조기기 설비 사업이다. 회사의 영엽이익은 연간 약 30억~50억원 수준으로 약 35명의 임직원 가운데 바이오·의약품 개발과 관련한 이력을 가진 인사는 없었다.

      수 십개의 사업목적을 가진 기업들이 해당 사업을 모두 추진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 정관에 사업목적을 추가한 이상 언제든지 해당 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의 실체는 없지만 기대감만으로 투자자들을 유인하는 방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투자심의위원회가 유명무실한 중소형 투자사들 또는 개인투자자들이 기업의 사업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재무제표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긴 어렵다.

      국내 PEF 운용사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사업 목적을 추가하고 IR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이를 강하게 어필하는 사례를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며 “명시된 사업목적 가운데 10분의 1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대부분인데, 주주들에 청사진을 제공하면서 단기간에 주가를 부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회사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를 유의해 투자처를 선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신사업(뉴딜) 투자 의지 또한 기업들이 무리한 사세 확장을 꾀하는 요인 중 하나다. 정부의 정책자금을 지원 받거나, 향후 뉴딜 펀드의 투자처로 낙점 받기 위해 신사업을 명문화 하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정부가 밝힌 ‘한국판 뉴딜’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아직 내려지지 않은 탓에 일명 ‘눈 먼 돈’을 기대하는 기업들에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