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회사 간 법률다툼에 총리가 훈수두는 나라
입력 2021.02.01 07:00|수정 2021.02.02 08:58
    丁총리, "부끄럽다. 남 좋은 일 될까 걱정된다."
    LGES·SK이노 ITC 최종판결 앞두고 직접적 압박
    상장사 주주간 이해관계 복잡…자칫 배임 야기할수도
    K-배터리 브랜딩의 욕심이 사기업 활동에 침해까지
    • "정말 부끄럽다. 양사가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K-배터리가 앞으로 미래가 크게 열릴 텐데 자기들끼리 그 작은 파이를 놓고 싸우지 말고, 큰 세계 시장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런 상황을 빨리 만들었으면 좋겠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두고 28일 정세균 국무총리가 한 발언이다. 의도를 떠나서 이 자체로 양사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이다.

      소송전은 지난 2019년 4월 29일 LG화학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법에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를 이유로 SK이노베이션을 제소하며 시작됐다. 양사는 3년여 동안 수천억원의 소송 및 법률비용을 들여 법률다툼을 벌이고 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작은 파이를 둔 다툼'이라고 딱잘라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SK이노베이션이 최종 패소할 경우 미국 시장 철수가 걸린 사안이다. 그렇다고 서둘러 합의에 임하자니 금액만 2조원 이상이 거론된다. 양사 한해 설비투자 규모만 3조원 이상이 필요한 시점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다.

      총리 입장에서 이 문제가 부끄럽거나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인 정세균의 개인적 소회에 그쳤어야 할 일이다.

      정히 이 문제가 국가경쟁력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됐다면 주관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를 통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조율했어야 할 일이다. 개인적 감정은 접어두는 게 공직자로서 책임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정 총리는 "양사가 싸우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으로, 남이 누군지는 제가 거론하지 않더라도 다 아실 것"이라고 했다. 총리가 과연 양사 소송과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총리가 말하는 '남'은 파나소닉의 '일본'과 CATL의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거론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것이라는 지점에선 은연 중에 양사 소송 문제를 국격 문제로 몰아가려는 의도까지 엿보인다. 상장회사가 나라를 대표해 타국보다 나은 제품을 만들고 총리를 떳떳하게 만들어주려 기업활동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현재 배터리 산업과 친환경차 시장의 성장은 특정 국가의 일방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선 문제다. 배터리 산업의 핵심 마중물은 유럽연합의 친환경 정책이 대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미국도 여기에 합류했다. 국내에선 현대자동차그룹을 비롯해 미국의 GM과 독일의 폭스바겐까지 국경을 떠나 탄소배출 저감을 목표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뛰어든 상황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총리는 양사 소송 문제로 혹여나 중국, 일본과의 경쟁에서 뒤쳐질까 조바심을 내고 있다. 하지만 양사 핵심기술인 리튬이온전지를 개척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 중 두 명이 일본인이다.

      총리는 "양사 책임자와 연락해 빨리 해결하시라고 권유했는데 해결이 안 되고 있다"라고도 했다. 국가와 사기업 관계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양사 최대주주가 만나 원만한 합의에 이르길 바라는 업계 안팎의 목소리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모두 상장회사다. 소송 문제가 오너 간 아름다운 화해를 연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2조원 이상 합의금을 놓고 주주들의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오너가 총리 말에 따라 어느 일방이 양보하는 식으로 서둘러 봉합할 경우 배임 문제로까지 불거질 수 있다.

      현 정부는 배터리 산업이 주목을 받자 'K-배터리'라고 브랜딩해 홍보대사를 자처해왔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 정부가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의도일 터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등 기업도 그 덕을 보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총리가 어떻게 사업을 영위해야 하는지에 대해 훈수까지 둘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칫하다간 잘 나가는 2차전지 산업에 K-배터리라며 국가주의 색채를 입히더니 주인 행세를 하려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