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업 육성 나서지만 규제 완화 더뎌…인식 여전히 '보수적'
무형가치 평가 중요하지만…대기업도 글로벌 표준과 괴리
"가치 확장 가능성 인정 않으면 한국 시장 저평가 계속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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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장에서 신산업 기업은 이제 확실한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가치주와 성장주로 양분 돼있었다면 이젠 성장을 해야 가치가 있는 ‘성장가치주’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신산업 기업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국내 기업들과 금융사들은 이런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 시각 때문에 성장성과 무형의 자산에 높은 값을 쳐주는 데 인색하다. 판단이 늦어 성장할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신기술 기업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한국 자본시장과 대기업들은 글로벌 흐름의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쿠팡이 뉴욕상장을 공식화하자 차등의결권 도입 논의가 재개됐고, 한국에서 큰 기업을 왜 국내에서 품지 못했냐는 자성론도 일었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선 적자기업 쿠팡의 가치를 인정할 방법이 없었다. 쿠팡의 재무 계획을 살펴본 곳은 ‘계획된 적자’가 허언이 아니란 점을 알았으나 출자자(LP)를 설득하기 어려웠다. 쿠팡은 2019년말 2000억원가량을 조달하려 했는데 이에 화답한 곳은 결국 외국계 투자사였다. 국내 LP들은 가치가 드러난 지금도 쿠팡 투자는 쉽지 않을 거라며 손사래를 친다.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 영상 메신저 앱 '아자르'를 개발한 하이퍼커넥트는 국내 유니콘 기업의 1~2호 M&A 투자회수 사례로 기록됐다. 인수자는 모두 해외의 유력 기업들이다. 동종 산업 안에서만 가치를 끌어 올린다는 시선이 있지만, 어쨌든 조단위 몸값을 인정받았다. 두 기업 모두 국내서 초기 투자를 받거나 협의를 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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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장에서도 신산업이 전통산업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에 의문은 있다. 다만 해외에선 이를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익이 나지 않아도 거래는 이뤄진다. 투자를 거듭할수록 기업가치는 커진다. 플랫폼과 고객 기반을 가진 빅테크 기업, 대형 투자사들이 흐름을 주도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유망 산업으로 떠오른 음식 배달만 해도 투자 경쟁이 치열했다.
아마존은 작년 영국 배달 스타트업 딜리버루(Deliveroo)에 5억7500만달러를 투자했다. 최근에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지만 기업가치는 빠르게 올랐다. 2017년엔 2조원이다 아마존 투자 때는 5조원 수준으로 올랐다. 회사는 올해 상장을 준비 중인데 몸값이 14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우버(Uber)도 작년 7월 미국 4위 음식배달업체 포스트메이츠(Postmates)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작년 상반기까지 1000억원 가까운 손실을 낸 기업에 26억5000만달러를 썼다. 우버이츠도 수천억원의 손실을 내고 있었지만 시장점유율이 2위로 오르고 매출이 늘어난다는 데 더 집중했다. 1위는 도어대시(DoorDash)로, 이에 6억8000만달러를 투자한 소프트뱅크는 작년말 상장으로 막대한 차익을 거뒀다.
반면 국내 자본시장은 신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가치 평가도 후하지 않다. 기업가치를 이익이 아닌 매출, 거래액(GMV)에 기반해 매기는 것이 생소하다. 플랫폼이 확장하면 고객과 돈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개념도 아직은 약하다. 가장 보수적인 평가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용평가사들은 최근에서야 시가총액 4위 네이버와 8위 카카오를 우량 기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딜리버리히어로(DH)가 매물로 내놓은 요기요는 이익 창출력이나 개별 사업성만 보면 배달의민족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국내 투자자들이 DH만큼 후한 가치평가를 해줄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해외 투자자들의 인수전 참여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베이코리아는 손꼽히는 GMV를 기록하는 커머스 기업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꾸준히' 이익을 내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할인 요소로 꼽힌다.
국내 VC들은 초기 기업을 발굴하고 유니콘으로 키우는 데 기여하고 있다. 작년 벤처펀드 결성액은 6조5676억원으로 전년(4조2433억원)에 비해 늘었고, 같은 기간 벤처투자도 4조2777억원에서 4조3045억원으로 증가했다. 모두 사상 최대지만 건당 투자 규모는 해외 투자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펀드 만기도 고려해야 하니 시리즈 투자를 이어가기도 쉽지 않다.
한 외국계 VC는 일찌감치 초기 유망 기업에 투자한 후, 이후 시리즈 투자는 자사로부터만 받도록 계약을 해 국내 운용사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한다. 반대로는 아직 우리 VC의 안목이나 과감성, 시리즈 투자를 이어갈 자금력이 그에 따르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골드만삭스PIA는 일찌감치 부동산 플랫폼 직방에 투자했고, 2019년 후속 투자도 주도했다. 골드만삭스PIA 출신 인사를 영입한 알토스벤처스는 직방 투자 물량 일부도 골드만삭스로부터 받아왔다. 미국의 직방 질로우그룹은 작년 초 대비 주가가 4배 이상 뛰었다. 상장을 준비 중인 직방도 수혜를 볼 것인지 관심이 모인다.
한 VC 대표는 “지금까지는 신산업 기업들에 투자했다가 중간에 발을 빼는 바람에 마지막 과실은 해외에 넘겨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앞으로는 덩치와 역량을 키워 성장 기업의 마지막 회수까지 함께 하는 것이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신산업 육성에 돈을 풀고 있지만 규제 완화 속도는 더디다. 창업자들은 좋은 아이템이 있어도 이해관계가 첨예한 영역엔 들어가기 꺼린다. 차라리 ‘시장 독재’가 낫다며 중국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한다. 규제가 강했던 국내 모빌리티 사업엔 외국계 투자사들이 다시 발을 들이는 분위기다. 쿠팡이 미국 증시에 간다고 하면 ‘한국 유니콘 기업의 쾌거’라고 할 것이 아니라 국내 시장을 어떻게 키울지 고민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 자본시장의 역량이 부족하다면 글로벌 수준으로 올라선 대기업들이 나서 대어를 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신산업은 지적재산권 등 무형 가치와 확장 가능성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지만 대기업의 시각은 여전히 보수적이다. 예상 매출에 기반한 거래(네이버 왓패드 인수)나 실사 중 몸값이 두배나 오른 기업을 끝까지 인수한 경우(SK그룹 플러그파워 인수)는 드물다. 글로벌 시장의 가치와 거래 관행에 익숙지 않다.
몇해 전 한 굴지의 대기업은 직원 5명뿐인 기술기업에 500억원을 쳐줄 수 없다며 인수를 포기했다. 해외 소프트웨어 기업 인수전에 참여했다가 경쟁사들의 반에도 못미치는 가격을 써내 체면을 구기는 사례는 허다하다. 신산업의 가치를 늦게 알아 보니 덜 좋은 기업을 더 비싸게 투자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에선 애플, 아마존, 알리바바, 국내에선 카카오와 네이버 등 빅테크 기업의 금융시장 공습이 매섭다. 국내 금융사들은 정부 주도 사업에 기계적으로 출자하고, 때마다 비금융 M&A를 외치는 데 그친다. 그 사이 외국계 자금을 끌어들인 카카오뱅크의 기업가치는 금융지주들을 넘어섰다.
롯데는 티몬 인수를 위해 협상 테이블을 차렸었지만 기업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발을 뺐다. 버티면 티몬을 싸게 인수할 것으로 봤을 수 있지만, 지금 더 위태해 보이는 것은 롯데다. 몇 년을 허비하고 나니 롯데 브랜드에 어떤 콘텐츠를 얹어도 파급력이 없다. 신세계는 신선식품을 수성하기 위해 쓱닷컴을 출범했는데, 전략 설정에 애를 먹는 분위기다. 쿠팡처럼 물류 인프라에 투자하는 대신 이마트를 물류 거점으로 활용하며 색채가 모호해졌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할 뿐 무형 가치나 아이디어에 대해선 가치를 매기지 않은 경향이 강하다”며 “가치 확장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국 시장은 앞으로도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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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2월 23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