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금 3000억에서 3조원으로…배터리 분쟁 불씨 키운 김준 SK이노 사장
입력 2021.02.25 07:00|수정 2021.02.26 17:10
    SK이노, ITC 패소했지만 아직 본격 협상은 없어
    김준 사장, ‘법적 다툼’ 자신감에 합의 기회 날려
    강공 일변 전략…그룹 미래 먹거리 위기 속으로
    양측 시각차 커 총수간 ‘대승적 합의’도 어려워
    • 이달초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판결로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분쟁 초기부터 협상보다 강대강 대치에 나선 터라 작은 돈으로 막을 수 있었던 위기를 키웠다. 사업 육성에 급급한 나머지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 상황을 오판하고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냔 평가가 나온다. 시장에선 ‘대승적 합의’를 기대하지만 SK그룹 수뇌부에 얼마나 정확한 보고가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란 시선도 있다.

      지난 10일(현지시간)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제기한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손을 들어줬다. ITC 판결 효력은 60일 이후 발생하니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선 서둘러 움직여야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협상 테이블이 차려지지 않고 있다. LG화학이 2019년 4월 ITC에 제소한 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급성장했고, LG화학이 생각하는 배상금 규모도 점차 커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금융사 고위 임원은 “LG화학은 분쟁 초창기엔 SK이노베이션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3000억원을 바랐지만 ITC 최종 판결이 난 지금은 합의금이 3조원까지 거론되고 있다”며 “LG 측에선 징벌적 배상까지 감안하면 합의금 규모가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으로선 섣불리 움직이기 어렵다. SK그룹은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해 전통 산업을 축소하고, 외부에서 적극적으로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계열사가 합의금조로 수조원을 지출하는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SK이노베이션은 SK IET 상장을 진행 중이고, SK종합화학 지분 매각도 추진하는 등 자금 마련에 분주하다.

      SK이노베이션은 사태를 키우기 전에 LG에너지솔루션과 손을 잡을 기회가 없지 않았다. 결과론이지만 성과가 급했던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 배터리 분쟁의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 아니냔 평가가 나온다.

      김준 사장은 2017년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으로 취임한 후 배터리 사업 육성에 매진했다. LG화학 전지사업본부 직원들이 2년간 SK이노베이션으로 대거 이동한 사건도 김준 사장 임기 중에 일어났다. LG화학은 직원 유출을 통해 기술을 빼갔다고 했지만,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기업 문화' 때문에 이적한 거라며 속을 긁었다.

      2019년 9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은 배터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 중재로 만났지만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배터리 기업들이 작년부터야 본궤도에 들어섰으니 당시만 해도 LG화학의 요구 수준이 높지 않았는데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LG화학은 1조원 규모 합의금을 바랐으나 김준 사장은 법적 다툼에 자신감을 보이며 이를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이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가다. 그룹에도 현금 합의 대신 다른 방식으로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LG화학이 투자금에 목마르던 상황이라 협상을 유하게 끌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SK그룹은 2019년말 인사에서 2020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김준 사장을 유임시켰다.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기류가 있었는데, 작년 2월 ITC가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 판결을 내리며 무색해졌다. 그 때부터라도 전향적으로 협상에 나설 수 있었지만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준 사장은 작년말 인사에선 수펙스추구협의회 환경사업위원장에 선임됐는데, 올해 ITC 최종 판결로 다시 체면을 구겼다.

      SK이노베이션은 마지막까지 강대강 전략을 펼치며 천문학적 비용을 썼고, 미국은 물론 한국과 유럽 배터리 사업까지 불투명해졌다. 물론 2016년 최태원 회장이 '딥 체인지' 화두를 던진 후 전사적으로 가장 공을 들인 것이 '배터리' 사업이니 속도를 줄이긴 쉽지 않았다. 김준 사장도 그룹 내 유력 주자로서 자리를 지키려면 새로운 성과가 필요했다.

      이제는 위험이 현실화했으니, 지금이라도 미래 먹거리를 지키기 위한 협상에 나서야 하지만 미온적인 분위기다. 사업을 책임지는 계열사 사장이라면 그룹이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을 오판하고 있거나, 그룹 수뇌부에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것 아니냔 지적이다. SK이노베이션은 합의 관련 진행상황은 비밀유지 사항으로 알려줄 수 없다고 밝혔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사업을 빠르게 키우기 위해 무리했다고 하면 SK그룹 입장에서도 사과하고 사업을 계속할 길을 찾으면 된다”며 “아직 합의금 협상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을 보면 그룹 수뇌부가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룹 수장들이 만나 ‘대승적 합의’를 이루는 그림은 현재로썬 기대하기 어렵다. 여전히 두 회사가 생각하는 합의금 차이가 크다. 그룹 총수라지만 계열사 일에, 그것도 이렇게 입장차가 판이한 상황에서 끼어들긴 쉽지 않다. 계열사에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이라면 그룹이 전향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 배터리 분쟁에 두 그룹의 총수가 조명되는 분위기라, 김 사장의 과가 묻히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