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없는 정보"를 부정하게 들여다 보게 된 SK이노베이션
입력 2021.03.08 07:00|수정 2021.03.09 09:44
    ITC "SK, 침해한 영업비밀 시간가치 10년" 명시
    최종의견서 두고 SK이노·LGES 입장은 '극과 극'
    '절차상 흠결' 인정하지만 "필요 없었다" 해명에
    SK이노 대응 두고 관련업계 불만·우려 커져
    •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최종의견서를 통해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 침해 없이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하기까지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에 대한 수입 금지 기간을 10년으로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못박았다.

      LG에너지솔루션(LGES)와 SK이노베이션, 양사는 ITC가 공개한 양사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소송에 대한 최종의견서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을 발표했다. LGES는 ITC가 공익을 고려해 정교한 판단을 내렸다고 보고 있다. 반면 SK이노베이션은 ITC가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SK이노베이션이 이 같은 입장을 내놓은 것은 최종의견서가 SK이노베이션의 윤리적 책임에 이어 사업적 역량에 대한 평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작년 2월 ITC는 "위원회는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가 심각한(extraordinary) 수준이라고 판단한다"라며 "증거인멸은 고위층(high level)이 지시하여 부서장(department heads)에 의해 전사적으로(through SK) 자행됐다"라는 이유로 조기패소 판결을 내렸다.

      최종의견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SK이노베이션이 LGES 영업비밀 침해를 통해 누린 사업적 이득이 기간으로 따져 10년에 해당한다고 명시했다.

      ITC가 이 같은 의견을 낸 데 SK이노베이션이 억울할 수 있지만 이를 드러내는 태도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SK이노베이션은 ITC가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실체적 검증 없이 절차상 흠결을 들어 판결했다고 말했다. 거꾸로 보자면 양사 소송에서 주요 쟁점사안 중 하나인 절차상 흠결에 대해선 사실상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이다.

      영업비밀 침해소송에서 증거인멸 등 절차상 흠결은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으로 꼽힌다. 수천억원 규모 법률비용을 지불한 SK이노베이션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과거 SK그룹 품에 들어오기 전 하이닉스 역시 특허침해를 둔 경쟁사와의 소송전에서 자료를 파기한 상대 측 잘못으로 소송을 유리하게 이끈 사례가 있다.

      SK이노베이션은 ITC가 실체적 검증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유감도 표했다. 공정시장이라는 링 위에서 심판 역할인 미국 정부기관 ITC의 조사·결정 역량을 문제삼는 모습으로 비친다.

      주장대로 ITC가 영업비밀 침해 사실을 검증할 역량이 없어 절차상 흠결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소송을 대비해 자료를 보전해야 하는 의무는 ITC뿐 아니라 미국 사법부에서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안이다.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서 ITC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려줄 심판은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절차를 어기고 공정한 판결을 저해한 SK이노베이션이 이를 문제 삼기도 궁색하다.

      SK이노베이션은 최종의견서에 명시된 22개 영업비밀이 자신들에게 불필요하다는 입장도 내놨다. 애당초 부정한 방법으로 영업비밀을 취득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해명이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SK이노베이션이 부서 자체를 통으로 빼갔다는 말이 업계에 파다했다"라며 "면접 과정에서 유출된 자료에 대한 언급이 오갔다고 하니 본질적으로는 필요한 정보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영업비밀을 들여다본 방식에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요약하자면 ITC가 절차상 흠결을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SK이노베이션은 정작 LGES의 영업비밀은 필요조차 없었다고 얘기한다. 그 논리라면 SK이노베이션은 졸지에 필요 없는 정보를 부정하게 들여다본 셈이다.

      SK그룹 차원에서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최근 배터리 업계 내에선 양사 갈등이 첨예해지며 이직이 사실상 막혔다는 불만이 나온다. 자본시장에서도 볼멘소리가 높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선 SK그룹의 딜을 맡을 경우 LG그룹 딜은 포기해야 한다는 인식이 통용된다. SK이노베이션과 LGES의 갈등이 산업 성장의 핵심인 인력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틀어막는 상황으로 확산했다. 사회적 가치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

      법과 원칙의 틀 안에서 소송이 진행됐고 ITC는 LGES의 손을 들어주었다. SK이노베이션은 10년간 수입금지 조치를 받아들이느냐 수조원대 합의금을 물어주느냐 기로에 서 있다. 미국 정부의 거부권 행사 카드가 남아 있지만 SK이노베이션의 손이 미치는 영역이 아니다. 결국 SK이노베이션이 심판 격인 ITC의 판결을 존중하고 LGES와의 합의금 협상에 임하는 것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