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부진시 퇴출…IB부문 더 가혹
"조직 부적응에 따른 리더십 부재"
외국계 IB 출신들, 국내 證 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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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권사 요직으로 온 외국계 투자은행(IB) 임원들의 말로(末路)는 사업부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리서치, 글로벌 사업 등 본인의 전문분야로 이동해 꾸준한 실적을 내는 임원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면 실적이 부진한 부서에 몸 담게 된 임원은 적응에 실패하는 사례가 많았다.
조직을 이끌어 영업을 통솔하는 것이 중요한 'IB부문'은 유독 외국계 IB 출신들이 불행을 맛보는 사업부문이다. 아래에서 위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국내 증권사의 조직문화를 깨부수고 임원으로 영입된 만큼, 조직을 이끄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국내 증권사들이 외국계 IB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즈음이다. 당시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IB, 장외파생상품 등 업무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어 2017년, 주요 증권사들은 '초대형 IB'로의 도약을 목적으로 외국계 증권사 출신들을 임원 자리에 앉혔다. 자기자본 규모 4조원 이상이어야 초대형 IB로 거듭날 수 있는데, 이를 목전에 둔 KB증권과 하나금융투자는 외국계 출신을 대거 영입해 해외 영업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당시 영입된 외국계 출신 인사들의 근황은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
리서치, 글로벌사업 부문 등 전문성이 뚜렷한 사업부문의 장으로 영입된 인사들은 아직 건재하다. 2016년 KB증권은 현대증권과의 합병 통합 이후 첫 리서치센터장으로 서영호 JP모건 전 센터장을 영입했다. 서 센터장은 지난해 홀세일부문장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다. 하나금융투자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영입된 크레디아그리콜(CA)은행 출신 고영환 본부장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IB 등 실적 변동성이 큰 사업부문을 총괄하는 경우엔 회사로부터 퇴출되기도 한다. 같은 증권사 내에서도 부서의 실적에 따라 희비가 갈렸다. 골드만삭스 출신인 서봉균 전무는 삼성증권 Sales&Trading(S&T) 부문장을 맡아 지금까지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서 전무는 외국계 주식 전문가 출신으로, 트레이딩(Trading) 수익으로 버티고 있는 증권사들 입장에선 필요한 인물이란 평이다. 실제로 서 전무는 지난해 연봉 11억2200만원을 받으며 사내 입지를 강화했다.
반면 삼성증권 FICC사업부로 영입된 JP모건 출신 채승일 상무는 최근 퇴출됐다. 주가파생증권(ELS) 부문 자체 헤지 비중이 높았던 삼성증권은 지난해 극심한 변동성 장세에서 ELS 자체 헤지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었다. 채승일 상무는 자체 헤지 능력 강화 차원에서 영입됐다는 평가가 많았던만큼,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진 것으로 분석된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개인의 특기를 보고 영입한 만큼 성과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라며 "지난해 삼성증권 FICC사업부문의 실적이 좋지 않았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유독 IB부문의 장으로 자리를 옮긴 임원들은 조직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2018년 신한금융투자로 영입된 맥쿼리증권 출신 이재원 투자금융본부장은 보직해임됐다. 사실상 퇴출 당한 것이나 다름 없단 평가다. 신한금융투자 기업금융2본부로 영입된 JP모건 출신 제이슨황 본부장도 최근 이직설이 크게 불거졌다. 황 본부장은 주식자본시장(ECM) 관련 사업 등을 총괄해왔는데 최근 신한금융투자에서 기업공개(IPO)를 담당하던 주니어 뱅커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책임론이 제기된 바 있다.
앞서 하나IB증권 대표로 영입됐던 이찬근 사장은 본인의 계획을 다 펼치기도 전에 임기가 만료됐다. 이후 하나IB증권은 하나대투증권(현 하나금융투자)로 흡수됐다. 당시 이찬근 사장과 뜻을 함께 했던 외국계 IB 출신 원호연 ECM실장 등도 '한국 금융회사' 특유의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떠났다.
말로가 불행한 본질적 원인으로는 '아래부터 위로 차근차근 올라갈 것'이라는 상식을 깨는 채용 절차가 꼽힌다. 승진을 목전에 앞두고 있던 직원들의 원성이 상당해지며 조직 내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지적이다. 영업을 통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IB 부문에서 외국계 IB 출신은 리더십이 부족하단 평이 나오는 이유다. 개인의 실적에 집중하다보니 유독 성과를 가시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딜(Deal)만 챙긴다는 혹평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UBS증권 임병일 한국 대표가 삼성증권 기업금융 총괄 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한 관련업계 관계자는 "국내 문화는 '형님', '동생'으로 부르면서 위계질서를 세우는 게 당연해서, 외국계 출신은 조직 장악이 쉽지 않을 것이다"라며 "조직보단 본인이 인정 받는 것을 중요히 여기고, 외부적으로 보여지기에 유명한 딜만 본다"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외국계 IB 출신들도 국내 증권사 이직을 꺼리고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출신들 입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직원을 벼랑 끝까지 내모는 국내 증권사의 문화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라며 "이직 생각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두려운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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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4월 09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