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배터리 보유 삼성·SK·LG에 부담
기존 계획과 충돌 문제 등 해법 복잡 평
美 요구 진행중…배터리도 비슷할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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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현재 글로벌 공급망(SCM)의 지리적 편중 자체를 안보 위협으로 지정하며 미국 내 생산설비 투자 요구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의 핵심 구매처다. 해외 경쟁사들이 앞다퉈 대규모 투자 계획으로 화답하고 있는 만큼 국내 주요 그룹의 손익계산도 분주해지고 있다.
대만 TSMC는 최근 실적 발표회를 통해 올해 투자 계획을 300억달러(한화 약 34조원) 규모로 확대했다. 3년간 100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과 일치한다. 미국 인텔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재진출 선언에 이어 보유 생산설비를 전환해 올해 중 차량용 반도체를 직접 공급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시장에선 양사의 최근 행보를 모두 미국과 연관 지어 바라본다. TSMC의 '3년간 100조원' 투자나 인텔의 '車 반도체' 화답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에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 주정부와 오스틴 반도체 공장 증설 투자 계획을 조율 중이다. 당초 20조원 수준으로 알려졌지만 규모가 대폭 불어날 가능성이 거론된다. 오스틴 공장 투자 계획을 조율하는 사이 미국 정부는 물론 경쟁사의 움직임이 크게 변화한 탓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상반기 중 삼성전자가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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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경쟁사보다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하는 것보다 문제가 복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TSMC의 경쟁은 크게 전공정에서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확보, 후공정에서 패키징 기술 경쟁력 증명 문제로 나뉜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5년 패키징 기술에서 TSMC에 밀려 애플 AP 물량을 빼앗긴 전력이 있다. 절치부심해 자체 패키징 기술을 확보했지만 선단공정 고객사 확보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는 평이다. 현재 갤럭시워치 등 자사 웨어러블 기기에만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TSMC가 삼성전자보다 한발 앞서 미국 현지 투자를 늘릴 경우 현지 팹리스를 고객사로 유치하고 이를 기반으로 EUV 노광장비 선점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거꾸로 삼성전자는 기술 로드맵에서는 공정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지만 고객사와 장비 확보에서 뒤처질 수 있다. 삼성전자가 확보한 EUV 노광장비는 TSMC의 절반 수준으로 추정된다. TSMC는 올해 밝힌 투자액의 80%를 7나노미터(nm) 이하 파운드리에 투입할 예정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TSMC가 파운드리 시장 과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투자 규모는 물론 장비 확보에서 이점으로 작용하고 더 많은 고객사를 끌어들이는 선순환을 일으킨다"라며 "파운드리 고객사인 팹리스 대다수가 미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적시에 투자 계획을 내놔야 할 거란 우려가 커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기존 증설 일정과의 충돌이나 과잉투자로 인한 수급 차질 걱정도 커지고 있다. 미국 현지 설비가 없는 SK하이닉스의 경우 진행 중인 투자 대부분이 국내와 중국 사업장 대상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19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2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 인텔이 DDR5 D램을 지원하는 중앙처리장치(CPU)를 출시하고 나면 SK하이닉스 역시 메모리 반도체 생산 공정에 EUV 노광장비를 도입을 본격화해야 한다. TSMC와 삼성전자의 경쟁적 투자 확대와 미국을 등에 업은 인텔의 행보로 메모리 2위 사업자인 SK하이닉스에도 영향이 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투자자와 경영진 사이 공유된 증설 일정과도 차이가 있고 경영진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우려가 적지 않다"라며 "SK하이닉스가 중국 노출도를 줄이거나 삼성전자가 올해 메모리 투자를 예정보다 줄이는 등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미국의 요구가 어느 정도일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도 우려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22일(현지시간) 대통령 주재로 기후정상회를 가지고 미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2005년보다 5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올라간 감축 목표치와 자동차 제조 원산지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의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에 따라 배터리 산업에도 반도체와 같은 논리를 들이댈 가능성이 제기된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3사는 물론 소재·부품·장비 부문 협력사까지 미국 현지 진출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실제로 LG에너지솔루션(LGES)이 GM과 미국 테네시 주에 새 배터리셀 합작법인(JV)을 설립하기로 하면서 협력사의 동반 진출이 이어지고 있다. LGES의 이번 투자는 미국의 중재로 SK이노베이션과 분쟁을 마무리한 직후 발표됐다.
SK이노베이션은 합의 직후 포드 물량을 추가 수주해 조지아 공장 증설 규모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미국에 본격 진출하기 전인 삼성SDI 역시 투자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바이든이 2차전지 재료 전반 SCM을 미국에서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의문이고 비용 문제 때문에 걱정이 커지는 것"이라며 "미국이 완성차 업체에 부품 75% 이상을 현지화하라는 식의 일률 규제를 들고 나오면 조립 공장만 들여선 안 되고 배터리 재활용 기술까지 밸류체인 전반을 현지에 깔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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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4월 2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