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조 K반도체 띄운 정부…기댈 곳은 또 삼성·SK 지갑뿐
입력 2021.05.17 07:00|수정 2021.05.18 10:14
    각종 지원책 냈지만 시기 늦고 중복인 경우도 많아
    '510조' 투자 모두 민간 부담…집행 가능성도 불투명
    정부 '일회성 이벤트'에 기업이 '제스처'만 보낸 꼴
    • 정부는 510조원 규모 투자를 포함한 ‘K-반도체 전략’을 내놨다. 이제라도 움직이는 것은 반길 만하지만 실속은 많지 않아 보인다. 지원책 상당 부분은 중복이거나 오래 전에 이뤄졌어야 하는 것들이다. 510조원도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부담이고, 그나마 그럴 것이란 기대에 불과하다. 이번 대책 발표가 1회성 이벤트에 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열린 ‘K-반도체 전략보고 대회’를 통해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시스템반도체까지 세계 최고가 돼 ‘2030년 종합반도체 강국’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했다.

      2년 전 모습과 겹친다. 문 대통령은 2019년 4월 30일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도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1위를 유지하는 한편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 팹리스 분야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정부는 ‘K-반도체 전략’을 내놓으며 메모리반도체는 경기 변동에 불안정하고,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은 열위하며, 산업 전반의 기술경쟁력과 성장기반은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20여년전 한국이 메모리반도체 1위로 등극했을 때부터 이어진 고민이니, 이번 정부의 현실 인식이 달라지지 않았다 문제삼을 것도 아니다.

      단 새로운 정책을 기대하긴 어렵다. 정부는 기존 반도체 제조시설을 연계해 세계 최대 ‘반도체 벨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여러 지역을 선으로 엮으니 마침 ‘K’자 모양이 됐다. 반도체 인력 양성, 차세대 기술도 선점 등 내놓을 수 있는 정책들이 총 망라됐지만 이미 2년 전에 대부분 다뤄졌던 것들이 확대 재생산됐다는 평가다.

      반도체를 ‘핵심전략기술’로 지정하고 세제 혜택, 규제 합리화, 용수·전력 등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한 발 늦은 모습이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진작 ‘첨단 투자지구’로 지정했어야 했고, 세제 혜택도 일찍 늘렸어야 했다. 미국은 강력한 리쇼어링 정책을 펼쳐 인텔마저 중국 사업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한국의 지원은 미미했다. 그 사이 미국과 유럽의 우리 기업들에 대한 공세만 강해졌다.

      세제 지원이나 규제 개선은 법개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반도체 살리기’가 정쟁 거리는 아니지만 국회에서 협치가 이뤄질 것이라 낙관하기 어렵다. 정부 지원엔 특혜 시비가 항상 따라 붙는다. 8인치 기반 파운드리를 증설하기로 했는데, 과거의 기술이라 전세계적으로도 설비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반도체 물 공급 부족 우려는 여러 해 전부터 나왔다. 지역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안이라 정부의 행정 절차는 더뎠다. 유사 시 우리 정부가 대만처럼 ‘농사를 짓지 말라’고 밀어붙일 수 있을리 만무하다. 삼성전자 평택 사업장에 넣을 전력 공사만 몇 년이 들었다. 한 달 전기료만 수십억이 나가는 사업인데 정부는 친환경 전력 사용을 권하고 온실가스 저감에 따른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한다.

      ‘K-반도체 전략’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510조원이다. 작년 대한민국 예산(512조원)에 맞먹는 금액이 10년 동안 반도체 산업에 투입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자금의 출저는 당연히 ‘민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부분 부담해야 한다. 그나마 1조원 규모로 꾸린다는 설비투자 지원금도 민간 기업에서 걷을 요량이다. 9개 기업에서 2조원 이상의 수요가 있었다고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정부가 투자, 펀드 조성, 인력 양성 등 전략을 내놓을 때마다 이에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71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2019년 밝혔던 계획(2030년까지 133조원)보다 38조원을 늘렸다. SK하이닉스는 8인치 파운드리 사업에 투자하고, 비메모리 공급 안정화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의 기대를 빌어' M&A 가능성도 내비쳤다.

      투자가 이뤄지기까지 변수는 많다. 두 회사가 반도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언제 다시 긴축 모드로 돌아가게 될 지 알 수 없다. 워낙 장기 목표니 '상징정 선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두 기업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챙겨야 할 사업도 많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담도 커진 상황이다. 당장 올 하반기면 대선 국면에 들어가니, 정책 연속성도 장담하기 어렵다.

      정부의 이번 정책은 ‘1회성 이벤트’에, 기업들의 화답은 말 그대로 ‘제스처’에 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