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사의 꿈' 실현 위해 주머니 털리는 계열사들
입력 2021.05.20 07:00|수정 2021.05.21 15:00
    대기업들, 세대교체 본격화로
    미래 성장동력 마련에 부담
    계열사에 배당금·출자 등 압박
    "우리만 희생" 계열사들 불만
    • 만년 저평가를 받았던 그룹 지주사들이 달라지고 있다. 지주사들은 그동안 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이지만 계열사 대비 특별한 행보가 없어 시장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SK㈜를 필두로 이젠 ‘투자전문회사’로 변모하며 스스로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지주사가 주도하는 신사업 성과는 곧 젊은 오너들의 경영능력 평가로 이어지기에 '빅딜'의 최종 권한도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지주사로 모인다. 그 과정에서 각 계열사들이 지주사의 '출자자'로 동원, 그룹 내 잡음이 이는 경우도 상당 수 보인다.

      지주사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곳은 SK그룹이다. 장동현 대표는 최근 간담회에서 투자형 지주사를 넘어 투자전문 지주회사로 진화하겠다고 밝혔다. 3월엔 기존 영문이름인 ‘SK Holdings Co., Ltd.’를 ‘SK Inc.’로 바꿔 지주회사(Holdings) 이미지를 벗었다. 주가 목표치로는 당시의 7배가 넘는 200만원 수준을 제시했다. 업계에선 SK를 두고 "사실상 사모펀드(PEF)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SK는 올초 첨단소재·그린·바이오·디지털 4대 영역을 중심으로 영역별 투자센터를 만들었다. 반도체·통신·에너지 등 기존 주력 사업과 직간접 관련은 있지만 투자방향은 사뭇 달라졌다. 특히 환경(Environment)에 방점을 찍고 있다. 동박 제조사 왓슨(3700억원), 초급속 충전기 제조사인 시그넷EV(2930억원), 리튬메탈 배터리 개발사 솔리드에너지시스템(400억원) 등 최근 투자는 전기차 시장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계열사가 동원된 딜(Deal)도 다수다. 지난 1월 SK E&S와 함께 미국 수소전문기업인 플러그파워에 총 1조6000억원을 들였다. SK건설과는 환경시설관리 기업인 EMC홀딩스를 1조500억원에 인수했다. 현재는 폐기물 전문업체인 클렌코 경영건 인수도 추진 중이다. 친환경 분야 포트폴리오 강화에 속도를 내려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현대중공업그룹도 대표 사례다. 현대중공업은 신사업 진출과 지배구조 개편을 동시에 추진하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핵심사업들은 별도 계열사보다는 지주사 밑에 중간지주사가 거느리는 식으로 개편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 경영권 인수 이후 그룹 내 기계부문을 통합한 중간지주회사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지주가 지난 2월 특수목적법인(SPC)인 현대제뉴인을 신설, 해당법인이 두산인프라코어 지분 35%를 보유하는 구조로 경영권 인수를 추진중이다. SPC가 지주사가 보유한 현대건설기계 지분(33%)을 넘겨받아 중간지주회사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중공업그룹은 비슷한 식으로 앞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하면서 조선부문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을 만들었던다.

      대우조선해양 두산인프라코어 경영권 인수를 위해 계열사들은 든든한 자금 주머니가 돼주고 있다. 현대중공업지주는 지난 2월 계열사인 현대글로벌서비스 보유지분(38%)을 글로벌 PEF 운용사 KKR에 매각(6460억원)했다. 여기에 보유현금 1500억원을 배당받으면서 총 8000억원의 실탄을 마련했다. 여기에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의 기업공개(IPO)가 예정돼 있고, 현대오일뱅크와 현대글로벌서비스 또한 잠재적 IPO 대상 기업이다.

      그룹 승계와도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이자 현대가(家) 3세인 정기선 부사장은 그룹 승계를 위한 키워드로 '신사업'을 선택했다. 정 부사장은 지난해말 발족된 '미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업계에선 정 부사장이 총괄을 맡은 신사업이 후계자 경영능력을 입증받을 시험대라고 보고 있다. 특히 정 부사장이 꽂힌 계열사는 작년 5월 자회사로 분리한 현대로보틱스다. 인공지능(AI)를 접목한 기업인 만큼 투자자 이목을 끌어올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다.

      한화그룹은 방산과 화학에서 태양광·에너지·우주로 그룹 주력이 변하고 있다. 특히 '우주사업'이 눈에 띈다. 계열사들도 관련 딜에 함께 뛰어들었다. 작년 6월 한화시스템이 영국 위성통신 안테나 기술기업 페이저솔루션을 인수했고 올초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관련기업인 쎄트렉아이 지분(30%)을 취득했다.

      김승연 회장은 최근 지주사 역할을 하는 ㈜한화와 화학·에너지기업 한화솔루션, 건설·서비스기업 한화건설 등 3개 기업에 미등기 임원으로 복귀한다고 공식화했다. 현재 한화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은 지주사격인 ㈜한화로, 그 아래엔 한화솔루션·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이치솔루션이 대표적으로 있다. 3세 경영을 앞두고 한화가 항공우주·방위사업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세대 교체의 신호탄으로 삼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업계에선 복귀성명에서 그룹 승계 색채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은 최근 그룹 우주사업 전반을 지휘하는 스페이스 허브의 팀장 역할을 받았다. 태양광과 수소에너지뿐 아니라 우주사업까지 진두지휘한단 점에서 니콜라 사기의혹 등 그간 불거졌던 자질론을 불식시킴과 동시에 3세경영 기반을 다지려는 행보로 풀이됐다.

    • 지주사의 사업 확장 과정에서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계열사들은 지주사에 배당을 지급해야할 뿐 아니라 투자의 ‘출자자’가 돼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일례로 SK그룹의 경우 SK㈜가 특정 기업을 인수하려고 하는데 자금이 부족할 경우 해당 분기 호실적을 낸 계열사가 대신 인수하라는 방침이 내려오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주사, 더 나아가 오너의 '꿈'을 실현하는 데 동원되는 계열사들은 회사 주주들의 불만도 잠재워야 한다. 자금이 회사 성장에 쓰이지 못하고 지주사를 통해 그룹 내 이종산업으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계열사 경영진들과 지주 전략실 간 잡음도 발생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지주 전략실의 경우 권오갑 회장에 직보하는 조직인데 빅딜 수행을 위한 인력 상당수를 외부에서 수혈했다. 팀장급 인력들도 회장에 직접 대면보고할 만큼 그룹 내에선 영향력이 크다는 평이다. 계열사와 지주 간 이해관계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만큼 빅딜 의사결정 입김이 센 지주 전략실에 불만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사례들 때문에 금융업계에선 '단 건 지주사가 먹고, 쓴 건 계열사가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도 회자된다. 운용업계에선 딜 인수주체로 그룹 지주사가 들어갈 경우에만, 믿고 펀드 포트폴리오에 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만큼 양질의 딜을 지주사가 가져가고 있는 것으로도 풀이 가능하다.

      투자은행(IB) 출신 인력들 사이에선 계열사 M&A 조직으로 이직을 꺼리는 분위기도 나온다. 한 외국계IB 관계자는 "계열사 M&A팀으로 가면 주도적으로 딜을 하기 어려울 듯 해 경력단절이 우려된다"면서 "계열사 내부에서도 '여기 올 바에야 지주사 M&A팀으로 가는 게 나중에 더욱 대우받는 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다만 지주사가 투자주체로 직접 나선다고 해서 모두 투자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투자업계에서는 CJ와 ㈜GS의 투자 전략에 물음표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GS는 꽤 오래 전부터 M&A 업무를 해왔지만 성과가 미미하자 '미래사업팀'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GS그룹의 고위급 실무진들도 "웬만하면 소규모 투자를 집행하자"라는 태도를 고수한다는 후문이다. CJ㈜도 보유 자회사 지분 매각을 통한 투자자금 회수가능액이 2560억원 수준으로 적은 편에 속한다.

      지난 3월 투자 전문역량을 기르겠다던 ㈜LG는 또 다른 의미에서 투자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4년 실리콘웍스(865억원), 2018년 ZKW홀딩스(4219억원)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M&A 성과가 없다는 평가다. LG전자가 스마트폰 철수를 선언한만큼 ㈜LG가 새로운 먹거리 발굴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