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퍼링 온다더라, 아니라더라...날마다 울고 웃는 자산시장
입력 2021.05.20 07:00|수정 2021.05.21 15:00
    7일엔 '노 테이퍼링', 13일엔 '인플레이션 공포'
    발표 수치 하나에 급등 급락 거듭...피로감 누적
    통화량 폭증에 실물자산ㆍ가치저장 자산 가격 급등
    "8월이 변곡점"...물가지수ㆍ잭슨홀 미팅 등 주목
    • 지난 7일, 미국의 4월 비농업부문 일자리 순증가 규모가 26만개에 불과하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예상치는 100만개였다. 시장 곳곳에서 '테이퍼링(Tapering;양적완화 축소)은 없다'는 선언이 쏟아졌다. 나스닥 기술주가 큰 폭으로 반등했다. 발표 직전 1.57% 안팎을 오가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순간적으로 10bp(0.1%포인트) 급락하며 1.5%선이 무너졌다.

      불과 일주일 후인 13일, 미국 노동부는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대비 4.2%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전망치는 3.6%였다. 2008년 9월 이후 13년만의 최고치였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 공포가 시장에 퍼지며, '테이퍼링은 시간 문제'라는 주장이 다시 득세했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다시 1.7%를 위협할 정도로 급등했고, 주요 주가지수는 일제히 내림세를 보였다.

      일희일비는 다음날에도 계속됐다. 14일 발표된 미국 4월 생산자물가가 전월비 0.6% 올라 예상치 0.3%를 크게 상회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미국 최대 송유관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이 6일만에 재가동되며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이 4% 내린 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른 안도감에 미 국채 10년물이 안정세를 보였고, 미국 주요 주가지수는 일제히 반등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린다. 최근 증시에서 가장 유명한 강세론자인 이은택 KB증권 스트레지스트는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이하 연준)가 실제 경기보다 훨씬 완화적일 것이며, 자산 버블을 용인할 것"이라고 코멘트했다. 반면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채권시장은 지속적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테이퍼링의 가능성은 높다"라고 언급했다.

      혼란의 자산시장이 수 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대립하는 두 시나리오가 있고, 시나리오에 유리한 수치가 나올 때마다 자산 가격이 요동치는 모양새다.

      한 편에서는 아직 실물경제는 본 궤도에 올라오지 못했으며,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고, 섣불리 양적완화를 포기했다간 충격이 올 거라고 주장한다. 자산 가격에 일부 거품이 발생하더라도 경제 회복을 위해 돈을 계속 풀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미 인플레이션이 고착화하고 있으며, 자산가격 거품과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향후 더 큰 문제를 만들 거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 증권사 전략담당 연구원은 "두 주장 중 누가 옳은지는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한동안 주식은 물론, 채권, 가상화폐 등 유동성의 영향을 받는 거의 모든 자산이 큰 변동성을 띌 것 같다"고 말했다.

    • 인플레이션 논란은 결국 한 점으로 모아진다. '돈을 언제까지 풀 것이냐'가 핵심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전 15조달러(약 1경7000조원)였던 미국 통화량(M2)은 현재 20조달러(약 2경2000조원)를 넘어서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 3월 기준 시중 통화량(M2) 역시 3313조원으로 전년동월대비 11% 급증했다. 12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증가세였다.

      통화량이 급증하며 물가에 영향을 주는 실물자산의 가격 역시 급등했다.

      최근 1년 새 목재와 구리의 가격이 각각 4배, 2배 오른 것을 비롯해 원유, 밀, 대두, 철광석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자산시장의 급등세는 더하다. 구리 가격이 2배로 뛰는 동안 글로벌 채굴 관련 업체 평균 주가는 4배 올랐다. 미국은 물론, 한국 역시 주요 주가지수가 올해 들어 사상 최고치를 잇따라 경신했다.

      '가치저장' 기능이 있는 자산 역시 마찬가지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 시장의 호황이 대표적이다. 암호화폐는 현 시점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부가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지만, 지금보다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급등을 거듭했다. 국채로 대표되는 안전자산의 이자율이 0%에 수렴한 가운데 암호화폐 투자는 자연스러운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을 정도다.

      롤렉스 등 럭셔리 시계 품귀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수요 폭증으로 일부 인기 기종은 신품 구매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이며, 리셀러(재판매) 시장에선 판매가의 2배 이상의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다. 최고급 스포츠카 시장에서도 일부 인기 기종의 중고차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태다. 연초 대체불가토큰(NFT) 투자 열풍이 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은 '돈을 시장에 지속적으로 풀어내는 양적완화가 멈춰야 지금의 자산 가격 급등 역시 진정이 가능하다'는 논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처음 만들어낸 미국 연준이 달러를 찍어내는 '윤전기'를 언제 끌 지 전망이 갈리며 지금의 변동성 장세가 만들어진 셈이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연준이 조만간 테이퍼링에 대한 힌트를 던질 것이라는 데 수십조 달러의 자금이 베팅되고 있다"며 "지금의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이라고 주장하는 연준이 언제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의 의견을 고수할 지를 두고 매일매일 희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복수의 전문가들은 오는 8월을 변곡점으로 꼽는다.

      우선 미 연준이 주장하는대로 지금의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인지, 본격적인지가 판가름 날 전망이다. 지난해 미국 경제는 봉쇄(락다운)으로 인해 3~5월 큰 침체를 겪었다. 지금의 물가 상승세는 기조효과(base effect)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7월 이후 미국 역시 경제 회복을 시작했기 때문에, 8월 전후의 전년대비 물가 상승률을 봐야 인플레이션의 성격을 확실히 할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8월 즈음엔 지금의 물가 상승을 이끌고 있는 병목현상(bottle-neck)도 해소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금의 원자재값 상승은 백신 접종률이 상승하며 소비는 급격히 회복세에 들어갔는데, 공급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데서 오는 불일치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역시 공급망 확충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만큼, 3분기 중엔 어느 정도 안정화될 거란 전망이 많다.

      8월엔 글로벌 금융시장의 큰 이벤트 중 하나인 연준 잭슨홀 심포지엄도 열린다. 잭슨홀 미팅은 굵직한 정책을 제시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연준이 지난해 새 통화정책으로 평균인플레목표제(AIT)를 공식화한 것도 잭슨홀에서였다. 만약 잭슨홀에서 테이퍼링에 대해 공식적인 신호가 나오지 않는다면, 당분간 지금 같은 양적완화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8월의 향방은 국내 증시를 비롯한 자산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국내 주요 증권사들은 올해 하반기 코스피지수 최고치를 3500선 이상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연준이 적어도 올해엔 테이퍼링 가능성을 시사하지 않고, 지금 같은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거라는 판단 아래 나온 예측치다.

      조연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5월은 경제지표의 기조효과가 가장 강한 시기로 일시적 쇼크에 따른 연준의 스탠스 변화를 단정짓기 어렵다"라며 "인플레이션 스파이크 이후 금리의 안정화가 예상된다는 점에서 위험자산 선호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증시는 물론, 부동산과 암호화폐 시장이 유동성의 영향을 계속 받을지 여부 또한 시장의 관심사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4월 기준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은 지난해 12월 이후 5개월 연속 1%이상 상승했다. 부동산원이 2003년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암호화폐의 경우, 최근 미국 법무부와 국세청이 세계 최대 거래소 바이낸스에 대한 조사에 나서며 유동성보단 규제 리스크의 영향을 좀 더 받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