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유동성에 '투자자' 고르는 벤처기업들?…막상 대형 VC는 무관심
입력 2021.09.06 07:00
    취재노트
    대형VC에 첫 투자 받아야 후속 투자 원활
    벤처업계, 자문사에 '이름있는 VC 투자' 요구
    막상 대형 VC는 "좋은 회사 없어"…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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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벤처캐피탈(VC) 업계에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벤처기업들은 투자자 명단 관리가 중요해졌다. 후속 투자를 원활히 받으려면 초기 투자자 명단에 나름 명성 있는 VC 하우스의 이름을 올려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들의 수요에 대형 VC의 문턱만 닳고 있지만 막상 대형 VC들은 '좋은 회사가 없다'라고 푸념하며 대형 딜(Deal)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업계에 자금이 넘쳐날수록 벤처기업과 VC간의 괴리감만 더 커지는 모습이다.

      올해 상반기 벤처투자 실적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해당 기간 벤처투자만 3조730억원 규모가 이뤄졌다. 지난 5년간 벤처투자 실적은 1조원대를 기록하는 데 그쳤지만 올해 상반기 3조원대로 훌쩍 뛴 것이다. 투자건수와 피투자기업 수도 2017년 상반기 대비 각각 2.3배, 2배 늘었다.

      VC업계로 유입된 풍부한 자금 덕택이다. 정책금융 출자가 올해 상반기만 8000억원 수준으로 전년동기 80% 이상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VC들의 출자규모도 2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난 상태다.

      이에 따라 벤처기업들은 VC '옥석가리기'를 하고 있다. 어떤 벤처기업이든 투자받을 기회가 늘어나면서 '투자를 받는 것'보단 '누구에게 투자를 받느냐'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첫 단추를 잘 꿰어야만 후속 투자를 원활히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스타트업 경영 자문사들은 '이름있는 VC에 투자를 받고 싶다'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 물론 명성이 낮은 하우스에 초기 투자를 받더라도 넘치는 유동성 덕에 VC를 직접 골라 후속 투자를 받을 순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름있는 하우스로부터 투자를 받긴 어려운 만큼 투자 관련 보도자료가 나오지 않아 주목도가 떨어진다. '모든 딜은 큰 하우스를 먼저 거치기 마련인데 이들로부터 성장성을 인정받지 못한 기업'이라는 낙인효과도 단점이다.

      기준도 모호하다. 풍부한 유동성은 VC 하우스의 자본금이나 유동자금 지표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네임벨류(Name Value)가 중요하다. 대표이사가 유명세가 있는 인물이거나, 엑시트(Exit)를 통해 큰 차익을 올렸던 전례가 있는 하우스 경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한 관련업계 관계자는 "패스트벤처스(Fast Ventures)는 히스토리(History)가 풍부한 박지웅 의장이 대표로 있기 때문에, 이 곳보다 보유자금이 많은 하우스가 분명 많음에도 불구하고 패스트벤처스가 투자에 들어간다하면 다들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다"라며 "네임벨류를 따지는 근거도 정형화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업 분석에 불성실한 VC들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대형 하우스의 경우 통상 심사역들이 상당히 까다로운 수준의 '투자심의위원회'를 거쳐야 하는 만큼 상당한 공부량을 소화해야 한다. 바이오 투자에 주력하는 한 VC 하우스는 사무실 한 구석에 의학 원서가 놓고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기도 한다. 반면 일부 VC는 기업분석 절차 없이 소수지분 투자를 통해서만 차익실현을 하고자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설명이다.

      막상 대형 VC들은 초기 투자를 원하는 벤처기업들에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마를 날 없는 자금줄을 믿고 VC를 직접 선택해 투자받길 원하는 벤처기업들의 생각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는 모습이다.

      VC들 사이에서는 '돈은 많은데 좋은 회사는 많이 없어 투자를 어디에 할지 고민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소위 '좋은 회사'라는 평이 있는 기업이 매물로 나오면 경쟁이 상당히 치열한 편이라는 설명이다. 투자금액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VC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만연하다.

      또한 상장 직전의 회사에 투자해 엑시트(Exit)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VC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피투자기업이 상장하는 것 외엔 많지 않다. 이에 상장이 용이한 업종이거나 시장으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벤처기업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회사가 조금만 좋으면 경쟁이 치열하고 회사 차원에서 VC를 골라간다. 업계가 좁다보니 싸우진 않는데 은근 기분 나쁜 일이 생기곤 한다"라며 "큰 하우스는 통상 100개 기업을 검토해 2~3곳에만 투자하는 편인데 기업가치가 다소 높더라도 회수 가능성이 높은 상장 직전 기업에 주로 투자를 나서는 분위기가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