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향이건 대체로 들어맞는 사명이 유리한 탓
'화학' 위상 변화…비용은 늘고 평가는 박하고
빈번해질수록 결국 투자자 혼란·불편할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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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SK와 한화가 화학 사업 계열사 사명에서 '화학'을 떼어냈다. SK그룹을 필두로 사업 재편·확장에 나설 때 영문 사명으로의 변경은 흔한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최근 SK지오센트릭과 한화임팩트의 경우 탄소중립 시계가 빨라진 가운데 화학 산업의 위상 변화를 나타낸다는 시각도 있다. 화학이 비용은 늘고 가치 평가는 박한 신세가 됐다는 이야기다.
최근 SK종합화학과 한화종합화학은 각각 SK지오센트릭(Geocentric)·한화임팩트(Impact)로 사명을 변경했다. SK지오센트릭의 경우 세계 최대 폐플라스틱 도시 유전 기업으로 성장 목표를 제시하고 사명부터 사업 모델까지 탈바꿈하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한화임팩트는 기술 혁신을 통해 인류와 지구에 긍정적 임팩트를 창출하겠다는 비전을 담아 사명을 선택했다는 설명이다.
그간 국내 기업은 그룹 이름에 주력 산업 명칭을 한글로 덧붙인 계열사 사명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사명이 사업 내용을 한정 짓는 한계 문제가 불거지자 SK그룹을 시작으로 지향하는 가치를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영문 사명으로의 변경이 잇따랐다. 가장 대표적인 게 지난 2011년 SK에너지가 SK이노베이션으로 이름을 바꾼 사레다.
SK그룹의 경우 최태원 회장의 경영철학으로 알려진 딥 체인지(Deep change)를 따라 지난 수년간 줄줄이 사명 변경을 이어가고 있다. SK그룹이 지난 수년간 법원 등기소를 통해 개설한 사명만 해도 SK크리에이트·SK디멘션·SK컨티뉴·SK퍼스트웨이브·SK넥스트모션·SK휴모스트 등 수십가지에 이른다.
사명에서부터 근본적인 혁신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서란 이유지만 추상명사가 사업 확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란 평가가 일반적이다. SK이노베이션의 투자자 사이에서 정유 회사에서 배터리 기업으로, 다시 중간지주사로 정체성이 변화하고 있지만 이름에서 오는 위화감은 없다.
투자금융(IB) 업계 한 관계자는 "에너지가 아니라 이노베이션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기업이 어느 방향을 제시하건 간에 대체로 들어맞는다는 이점이 분명하다"라며 "ESG 같은 기업의 비재무적 가치 지표가 기관 투자자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고 환경 규제가 연일 쏟아지며 기존 사업 입지가 불투명해지며 가치 지향적 단어로 사명을 변경하는 사례는 더 늘어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SK지오센트릭과 한화임팩트의 경우 최근 시장에서 화학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양사는 모두 비상장사로 SK지오센트릭은 소수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고 한화임팩트는 최근 기업공개(IPO) 계획을 철회한 바 있다.
SK지오센트릭이 추진 중인 지분 매각은 SK그룹 차원에서 추진하는 친환경 사업 강화를 위한 재원 조달 방안으로 풀이된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사업 지분 일부를 유동화해 친환경 사업에 투입하는 식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에 지분 가치는 쪼그라들고 있다. 이 때문에 사명 변경과 함께 폐플라스틱 재활용 등 신사업을 내세워 기업 가치 사수에 나선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한화임팩트 역시 시장이 바라보는 기업 가치와 한화가 기대하는 기업 가치 사이 격차가 커 상장을 철회한 것이란 목소리가 높다. 한화임팩트는 사명 변경과 함께 탄소중립 의지와 인공지능(AI)·데이터·바이오 등 신사업 발굴 계획을 제시했다. 최근 시장에서 화학 산업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가 빈번해질수록 시장의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주요 그룹 대부분이 모회사, 자회사를 가리지 않고 신사업 발굴에 나서고 있어 모호한 명칭이 투자자 불편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대부분 기업체가 사업부 별 매출 비중을 일일이 따지기 전까지는 누가 어떤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로 SK지오센트릭의 변경된 사명을 발표하는 간담회에서 새 사명을 두고 '천동설(Geocentric Theory)' 아니냐는 질문이 거론되기도 했다. 당시 SK지오센트릭 측은 "천동설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지구의 중심이라는 어원의 의미로 도입했다"라고 답변했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상장이나 지분 매각을 앞두고 일종의 스토리를 부여하는 차원에서 매력적인 선택지일 수는 있지만 결국 투자자는 실적과 성장성을 보고 투자하는 것"이라며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할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신사업의 수익성이 기존 사업을 대체하지 못할 경우 큰 효과를 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