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피 급급한 IPO 시장, 책임지겠다는 주체가 없다
입력 2022.05.04 07:00|수정 2022.05.04 13:56
    취재노트
    물 빠지니 드러나는 IPO 시장 플레이어들의 면피성 태도
    발행사 '자금조달'·증권사 '주관계약 이행'·VC는 '엑시트'
    거래소도 국내 증시 유치하면 그만…금융당국도 성의만 보여
    상장 앞둔 벤처 산적, "상장 외 엑시트 방안 모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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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수영장 물이 빠지면 누가 옷을 벗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최근의 기업공개(IPO) 시장이 이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묻지마 투자'가 이어지던 IPO 시장이 금년 들어 시들해지며, '공모가 고평가' 논란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이런 현상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임하는 시장 주체는 없다시피 하다. 금융당국부터 주관사, 발행사와 기존 주주에 이르기까지 '면피성 태도'만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피해는 공모주 투자자들만 볼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IPO 시장 분위기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음악은 멈췄는데 참가자들은 눈치보며 춤을 추고 있는 상황'이다. 

      2년 전 호황기의 기억에 고무돼있는 발행사는 여전히 많다. 주관 계약을 맺은 증권사들은 기관들이 입을 모아 '상장해선 안 된다'고 평가하는 기업들의 '과도한 몸값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도전장을 IPO 시장에 내밀고 있다. 투자로 기업가치 상승을 가능케한 벤처캐피탈(VC)업계 관계자들은 투자금회수(엑시트)를 위한 상장의 밑작업에 정신이 없다. 거래소는 국내 유망 벤처기업의 해외 상장을 막는 데 집중하고,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비교군 선정'(피어그룹)에만 칼을 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상장 이후 IPO 시장은 한소끔 끓어오르다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지난달 증권신고서를 제출한 SK그룹 계열사 SK쉴더스, 원스토어, 11번가와 더불어, 컬리, 쓱닷컴, 오아시스마켓 등 유통플랫폼, 케이뱅크 등이 상장 후보군으로 올라있는 상태다. 금리인상 우려와 전쟁 등 대내외적 불확실성으로 주가가 하락세를 이어가는 증시 환경에서, 과거만큼 이들이 '당연히 흥행 할 것'이란 기대감은 크지 않은 모습이다.

      오랜만에 올라온 대기업 계열사 SK쉴더스와 원스토어의 증권신고서를 두고 기관들은 공모가가 높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이들의 밸류에이션(Valuation) 방식은 2년 전 호황기 당시 상장에 나선 발행사들의 것과 유사했다. 일례로 원스토어는 상장 전 판매촉진비 등으로 매출을 한껏 올렸고, 피어그룹으로 글로벌 기업인 애플과 알파벳을 선정했다. 이같은 '숫자만들기' 방식의 밸류에이션과 관련해 원스토어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갈렸다는 후문이다.

      증권신고서 공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SK쉴더스와 원스토어는 피어그룹을 교체했다. 원스토어는 텐센트, 네이버, 넥슨 등을 비교기업으로 변경했다. SK쉴더스는 에스원, 안랩, ADT Inc 등에서 에스원, 안랩을 남기고 코스닥 상장사인 싸이버원, 대만 보안기업 대만 쎄콤(Taiwan SECOM)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두 기업 모두 공모가는 그대로 뒀다.

      논란은 '공모가' 부분에서 발생했는데 비교기업만 바꾼 모양새다. 이는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의 피드백에 따라 이뤄진 수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금감원이 공모가는 그대로 두고 비교기업만을 바꾸도록 요구한 것은 일종의 '면피' 같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공모가를 건드리면 풍파가 상당할테니 피어그룹만 수정케 한 것으로 보여진다"라며 "상장 이후 주가가 흐를 경우 금융당국은 '가만있던 건 아니다'라고 면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면피성 태도'는 IPO 시장 전반에서 포착되고 있다. 그간 발행사와 주관사의 밸류 산정에 대한 이견은 꾸준히 발생해왔다. 다만 주관계약을 맺은 증권사 입장에선 발행사의 요구에 맞춰 에쿼티 스토리 및 기업가치 산정 방법론을 만들어줄 수밖에 없단 토로다. 발행사 또한 보통 초기 투자한 주주들의 눈높이에 맞춰 가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엑시트 창구인 IPO가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초기투자자, 거래소, 금감원 등 관계자들의 '면피적 태도'가 눈에 띈다. 그 누구도 고밸류 리스크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먼저 VC업계 관계자들은 투자금을 회수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문제는 거듭되는 바이오기업의 상장 심사 탈락이다. 2019년 바이오기업의 코스닥 특례상장을 활성화해 주겠다던 거래소가 최근엔 심사 난이도를 올린 것이 그 배경이다. 이에 따라 최근 VC업계 관계자들은 거래소와 소통을 늘리기 시작했다. 다만 이를 두고 냉정한 평가가 나온다. 거래소에게 투자금회수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보단 '제대로 된 기업'에 투자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는 쓴소리도 제기된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에이프릴바이오 등 VC업계가 투자를 했던 바이오 기업들이 상장 심사에서 좌절되면서 업계에 상당한 불안감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라며 "물론 기술특례 상장 제도 자체가 투자자들의 투자금 회수를 돕는 장치에 가까웠던 데다, 그간의 투자는 아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참여하는 클럽딜 형태를 많이 띄었던 것을 감안하면 거래소와 VC업계 간의 소통이 달갑지만은 않게 보일 순 있다"라고 말했다.

      거래소는 국내 유니콘 기업을 국내 증시에 유치만 하면 그만인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해 쿠팡이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한 이후 거래소는 국내 유니콘 기업들을 대상으로 '상장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일정 요건을 갖추면 과거의 영업실적 대신 미래의 성장성을 토대로 심사하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당시 거래소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던 곳 중 하나가 컬리였다. 컬리는 아직 상장심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다만 공모 흥행 여부는 투자자들에게 달려있다. 투자자들은 컬리에 대해 '투자가 망설여지는 IPO 매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는 장기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단 상장을 앞둔 벤처기업이 산적해있다. 컬리를 선두로 와디즈, 헤이딜러 등 다수의 벤처기업이 상장을 목표로 투자유치를 받고 있다. 파운트자산운용도 주주로부터 상장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비상장주식 시장의 넘치는 유동성 때문에, 이들의 몸값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왔던 것은 또다른 고민거리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향후 상장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는데 상장 시장 분위기가 좋지 않아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다"라며 "국내는 '상장' 위주로만 투자금 회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 외에도 투자금 회수를 할 방법을 마련하는 게 시급해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