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 공모가' 아무도 모르는데...금감원은 면피만
입력 2022.05.12 07:00
    취재노트
    금감원發 '공모가 마사지' 사례 누적…일종의 음지감독 평
    허술한 공모가 논리 늘었어도 금감원 '가격 개입'은 별개
    수요예측서 가로막힌 SK쉴더스…무색해진 고쳐 쓴 신고서
    해외社 3곳은 안 되고 1곳은 되고…금감원이 1차 밸류 관문
    가격은 원래 시장이 결정…'적정가' 시장에서 다투게 놔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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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금융감독원 요구로 증권신고서를 고쳐 쓰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지난해 SD바이오센서 이후로 최근의 SK쉴더스·원스토어까지, 시쳇말로 '공모가 마사지' 사례가 쌓이고 있다. 물론 금감원은 공식적으로 가격을 문제 삼은 적이 없다. 그러나 금감원이 "다시 제출"하라면 "비교 기업군 정도는 수정해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고 있다. 

      무리하게 공모가를 끌어올리는 발행사·주관사가 분명히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금감원이 나서서 가격을 사전 조율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건 완전히 별개 문제다. 비교 기업을 수정하건, 할인율을 조정하건 금감원이 눈치를 주는 시점에 적정 가격보다 싸다, 비싸다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는 금감원이 적정 가격을 알고 있다는 얘기로 시장에 비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수정한 신고서들이 ▲투자자의 합리적 판단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중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사전 예방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듯하다. 

      그럼 이야기는 결국 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금감원이 '면피'에 급급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 수요예측 부진으로 상장 철회한 SK쉴더스도 신고서를 한차례 수정하긴 했지만 도긴개긴이었다. 지난 3월 약 4조7000억원으로 평가한 시가총액을 비교 기업군 교체로 4조2000억원까지 깎았는데 공모가 밴드는 똑같이 3만1000원~3만8800원이었다. 어차피 원하는 몸값은 정해져 있다. 할인율을 마사지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금감원은 전자는 안 되고, 후자는 된다고 했다. 

      정작 SK쉴더스의 기업공개(IPO) 계획을 꺾은 건 기관투자자들이다. SK쉴더스 측은 기업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기 어려웠다고 설명했지만 결국 시장 눈높이보다 비쌌다는 얘기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신고서가 드나드는 길목을 금감원이 틀어쥐고 허·불허를 외쳐봤자 원래 가격은 시장에서 정해져 왔다. 

      금감원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러니 도대체 왜 하나마나 한 신고서 정정 요구를 반복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여론 눈치는 봐야 하고 법적 근거는 부족하니 '음지 감독' 하는 거란 목소리가 적지 않다. 

      높은 공모가에 혹한 투자자들이 우루루 손실을 봤을 때 혹시나 금감원 책임론이 불거지진 않을까, 금감원도 최소한의 노력은 기울였다고 변명 삼기 위한 사례를 마련하는 걸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이것도 규제 권력의 일종이라 한 번 휘두르고 보니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금감원의 진실한 노력으로 보더라도 음지에서 공모가에 개입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애초에 공모가 결정 방식으로 인한 투자자 피해가 무엇인지부터 불투명하다. 

      지난 2년 동안 시중에 풀린 유동성 도움으로 실제 가치 이상의 자금을 손쉽게 조달한 발행사가 많았다. 기업 가치가 계속해서 오를 거란 전망이 대세였으니 너도 나도 기대감만으로 공모주에 투자했다. 그러나 LG에너지솔루션을 끝으로 분위기는 내리막을 타고 있다. 올해 IPO 시장에도 조 단위 대어가 즐비하다지만 이미 기관·개인 가릴 것 없이 시들해진 참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허술한 공모가 산정 논리가 통할 때도 있고, 안 통할 때도 있다는 건데, 수십 년을 되풀이해온 일이다. 

      삐뚤게 보자면 지난해 이후 이어진 음지 감독엔 금감원 도움 없이는 다수 투자자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거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실제로 동학개미 상당수가 공시서류 살필 생각도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한 경향이 짙다. 

      금감원이 이런 위험한 투자 행태를 바로잡길 원했다면 공모가를 손댈 게 아니라 '공시를 봅시다' 캠페인을 벌이는 게 적합했을 터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공시 내용에 허위가 없다면 투자 손실은 어디까지나 판단 주체인 투자자 개인의 책임"이라며 "당국 차원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건 책임질 수 없는 문제에서 후견인을 자처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음지 감독이 지속되는 게 시장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도 않다. 정정 요청을 받고 비교 기업과 할인율, 공모가를 조정해 상장 계획을 추진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금감원은 1차 밸류에이션 관문이 됐다. 새로 써낸 신고서를 금감원이 문제 삼지 않았다는 건 거꾸로 보자면 허락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나중에 손실을 본 투자자들이 왜 두 번, 세 번 퇴짜놓지 않았냐고 금감원에 따지면 "우리는 공식적으로 가격을 문제 삼은 적 없다"라고 발뺌할 건가. 

      시장 눈높이 이상으로 무리하게 공모가를 산정한 기업은 시장에서 최후를 보게 놔두면 될 일이다. 금감원이 비교 기업군에 해외 기업 3곳은 너무 많고, 1곳이 양심적일 거라 눈치 줘봤자 투자자 이해득실 셈법을 넘어서기 어렵다. 건전하지도 않다. 운 좋게 상장을 마친 뒤 주가가 공모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더라도 공시 내용에 허위가 없다면 금감원 책임이 아니다. 상장사 주가가 기대만 못할 때 욕먹어야 하는 건 금감원 아닌 기업 경영진이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여론이 책임을 추궁한 측면도 분명 있다. 

      이를 두고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금감원 같은 금융당국 임원실에서 구독하는 신문을 모두 끊어버리고 인터넷 뉴스도 못 보게 해야 한다"라며 "언론은 일 터지고 나면 기계적으로 주무부처 책임 소재를 뒤적거리는 곳인데 당국 수장들이 그런 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직원들이 맨날 엉뚱한 일에 골몰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