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中 사면…국제 정치 한복판에 서게 된 이재용 부회장
입력 2022.08.16 07:00
    취재노트
    이재용 부회장, 광복절 특별사면·복권…경영 복귀 가능
    美·中 갈등에 정치 논리만 남은 반도체 산업…전운 고조
    美 인텔·마이크론 보조금 노린 투자 발표 이어가는데
    TSMC, 삼성보다 한발 빨리 美·日 투자 발표하며 소통
    정부 노력한다지만 선택은 이 부회장 몫…"녹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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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공식적인 경영 복귀가 가능해졌지만 반도체 시장엔 전과 비교하기 힘든 수준의 전운이 감돈다. 반도체가 국제 정치의 핵심 의제로 부상한 가운데 삼성전자라는 대선단의 키를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반도체의 지경학(地經學)적 가치가 부상하는 만큼 이 부회장 앞에 놓인 선택의 복잡성과 무게감도 커져갈 전망이다. 

      12일 정부는 광복절을 맞아 이 부회장을 비롯한 경제인·노사관계자·특별배려 수형자 등 1693명을 15일 특별사면·감형·복권 조치한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6개월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지난해 6월 가석방됐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지난달 형기 종료 이후 5년간 취업이 제한된 상태였으나 이번 사면·복권 결정으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가능하게 됐다. 

      경영에 복귀하는 이 부회장 앞에 놓인 반도체 산업은 시쳇말로 '정치판'에 비유된다. 반도체가 더 이상 시장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9일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일(8월 24일)을 앞두고 열린 한중 외교 장관 회담에서 중국은 '개방과 협력을 견지해 공급망 안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요구를 내놨다. 새 정부 들어 한국이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하고 '칩4' 동맹 참여를 검토하는 등 행보를 겨냥한 발언이다. 한국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는 투로 한국 정부에 은근한 압박을 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엄밀히 따지면 공급망 문제를 두고 정부를 압박한 것은 미국이 먼저다. 이전 트럼프 행정부에서부터 시작된 중국 반도체 굴기 견제 정책은 바이든 행정부 들어 '공급망 재편'으로 구체화했다. 현재 미국은 자국 내 첨단 제조업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중국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타국 기업 자산을 활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이 주도하는 새 질서 구축에 가장 맞춤한 기업이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공식 복귀한다는 것은 최대 시장인 미국과 중국의 이 같은 요구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미국을 택할 경우 중국 현지 생산설비와 고객사 관리는 물론 같은 시장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경영 활동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을 택할 경우 핵심 부품·장비 수급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이 보유한 광범위한 반도체 관련 지적 자산(IP)은 가치사슬 전반에서 언제든 빗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 주요 공정 대부분에 미국이 보유한 IP가 사용되기 때문에 미국이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결론만 내리면 언제든지 경쟁국 기업 활동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라며 "네덜란드 기업인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물론 불화아르곤(ArF)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까지 중국에 판매를 막고 있다. 해당 장비가 없으면 공정 미세화가 불가능해 산업이 정체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각국 경쟁사는 이해득실을 감안해 발 빠르게 행동에 나서고 있다. 

      경쟁사 마이크론은 2분기 실적 발표와 함께 전보다 더 비관적인 하반기 전망을 제시하면서도 미국에 400억달러(원화 약 52조원) 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에 재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이 반영된 계산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이 같은 경쟁사의 행보가 그간 시장 질서에 크게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이크론의 이번 대규모 메모리 투자 계획은 당장 공급과잉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인텔과 TSMC의 파운드리 투자 계획 역시 삼성전자의 후속 투자 발표와 맞물려 공급 과잉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메모리의 경우 가격 변동성이 커 삼성전자의 캐시카우인 메모리 사업에 타격이 불가피하단 분석도 나온다.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현재 미국의 요구대로라면 마이크론이 투자할 곳이 미국 땅만 남게 되는데, 동아시아에 비해 원가 부담이 40%가량 높다"라며 "보조금 수혜 기대감이 없다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고, 수혜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익 논리를 일부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라고 지적했다. 

      메모리 사업에서 확보한 현금을 파운드리 추격전에 투입 중인 삼성전자로선 달가울 리 없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사실상 승자가 없는 치킨게임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삼성전자의 경우 자국 정부와 호흡을 맞추는 인텔과 마이크론에 비해 동일한 선택을 할 때 더 큰 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인텔이 선단공정 비메모리 반도체에서도 다시 종합반도체기업(IDM) 모델을 택한 것이 패착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고 미국 현지에 같은 시기 투자가 집중되는 것이 제살 깎아먹기란 시각도 여전하다"라며 "요즘 분위기는 미국이 중국을 빼놓고 좁혀진 시장 안에서 치킨게임을 유도하는 듯한데, 과거 치킨게임처럼 다자구도를 청산해 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승패가 없는 치킨게임이 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대중국 강경파로 분류되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 TSMC를 방문해 최고경영자(CEO)와 미국 현지 투자를 논의하기도 했다. 대만 역시 한국과 비슷하게 대중 노선에 따른 민감도가 높은 국가이지만, TSMC는 지난 2년 동안 삼성보다 한발 앞서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해 왔고, 일본 반도체 기업과의 소통도 강화해 왔다. 

      요약하면 삼성전자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서 각국 경쟁사의 의사결정 속도까지 고려하며 저울질을 이어나가야 한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도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겠다고 방침을 내놨지만 정부 역시 삼성전자로부터 대규모 투자와 고용 계획을 약속받은 사실상의 채권자이기도 하다. 결국 최종 선택은 이 부회장 몫으로 남게 될 텐데, 어느 때보다도 쉽지 않을 거란 우려가 가득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요즘 같은 때야말로 정부가 나서서 현명한 판단을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반도체처럼 복잡한 사안에서 정부가 어디까지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회의감이 적지 않다"라며 "이 부회장은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로 국내 정치권에서 요구되는 메시지에 적극 대응해왔는데, 이제 미국과 중국으로부터도 그런 압박에 놓이게 된 터라 상황이 녹록지 않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