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가 앞당길 내연기관 구조조정 경착륙…손 놓고 있었던 韓 정부
입력 2022.08.30 07:00
    취재노트
    美 IRA에 민관 '원팀' 대응 예고…모처럼 일치단결
    뒤통수·'먹튀'라 보기엔…예고대로 일 벌리는 美
    5월 韓美 정상회담 때도 우려 컸는데 인지 못했나
    '청구서' 받아가듯 하는 美…선거로 바빴던 韓?
    IRA로 내연기관 생태계 구조조정 앞당겨질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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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국내 완성차 생태계가 잔뜩 긴장하며 모처럼 정부와 기업들이 일치단결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중심으로 민관 역량을 결집해 '원팀' 대응에 나서겠다고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서명한 내용대로라면 매년 10만대 이상의 완성차 수출 차질이 우려된다는 주장도 때맞춰 마련됐다. 

      기업 혼자 대응이 불가한 만큼 정부가 외교·정책 양면에서 힘을 써주겠다는 건 다행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성과를 이끌어낼지를 두고선 회의적 목소리가 더 많다. 지금까지 뭐 하다가 이제 와서 호들갑이냐는 냉소적 반응도 적지 않다. 

      휴가를 마친 바이든 대통령이 IRA에 서명하자 '먹튀' 당했다는 표현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그 표현들이 정확한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 계획이 한국에 양날의 검이란 우려는 바이든 당선 이후 꾸준히 거론돼 왔다. 

      보조금 차별이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게 됐다는 점을 제하면 미국은 예고대로 일을 벌이고 있다. 일관되게 자국 산업 보호 관점에서 다소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다. 예상을 벗어난 돌발 변수로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미국은 자신들이 총대를 메고 중국과 러시아를 손봐주고 있다는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 그 대가로 받아 간 한국 기업 투자에 대한 보상은 이미 충분히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한국 민관이 한목소리로 곤란한 내색을 표한들 미국이 꿈쩍이나 할지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바이든 대통령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시장에선 마냥 반길 일이 아니란 염려가 가득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부터 미국 정부의 뚜렷한 의중이 읽히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라며 "새 대통령 취임과 함께 한미 관계를 재설정하는 상징적 자리에 재계 총수들이 대거 동원돼 현지 투자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정부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말이 많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바이든 정부 이전부터 코로나 이후 불거진 글로벌 공급망 혼란을 빌미로 자국 제조업 부활을 꾀하고 있다. 안보 논리를 내세워 동아시아에 편중된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제조업을 미국 땅에 옮겨 깔아야만 하는 법안을 찍어내고 있다. 주목할 지점은 미국이 간곡히 부탁하는 투가 아니란 점이다. 

      LG그룹을 찾았던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 발언에서도 미국이 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잘 드러난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동맹과의 협업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노력 중이다…(중략)… LG와 같은 한국 기업의 미국 현지 투자 덕에 이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잘 키워낸 기업 덕에 미국에 도움도 주고 생색도 내고 체면 살리는 그런 구도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미국이 앞장서서 중국이나 러시아 등을 상대하고 있으니 대놓고 청구서를 내미는 모습에 가깝다. '공동의 목표'라고 전제를 깔아버렸으니 회비를 걷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자면 배터리와 반도체가 받아든 회비, 청구서를 현대차그룹이 가장 늦게 정산한 셈이다. 

      현지 투자 계획을 내놨지만 애당초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는 반도체·배터리에 비해 협상력이 낮다. 삼성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와 LG·SK의 배터리는 미국 현지 기업이 당장 대체할 수 없는 인프라에 속한다. 전기차는 미국에도 GM과 포드, 스텔란티스 등이 있다. 굳이 현대차의 전기차를 받아쓸 이유가 없다.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 한국 정부의 역할론이 거론되는데, IRA야말로 미국이 자국 산업과 일자리 보호를 위해 꺼내든 역할론의 핵심이다. 

      이처럼 구조적 불리를 정부 당국이 정말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늑장대응 또는 손놓고 있었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 최대 화두는 대선 정국이었고 정권 교체기는 기업으로 따지면 경영진 교체를 의미하는데 누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살필 수 있었을까"라며 "미국의 경우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대통령이 바뀌어도 통상 전략은 정부 차원의 통일성·연속성이 있는데 한국은 선거철에 모든 이슈가 뒷전으로 물러나는 편이라 별다른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을 거라 본다"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으로선 미국 현지 투자에도 불구하고 판매와 점유율 경쟁에서 보조금 차별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내연기관 투자를 지속하겠단 결정이 오래가지 못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국내 완성차 생태계의 맏형 격인 현대차그룹의 부담이 커질수록 내연기관 생태계 구조조정 시계도 급박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원래부터 구조조정 경착륙 이야기가 많았는데 IRA가 이를 더 앞당기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현대차그룹이 미국 현지 생산 일정을 앞당기는 방법 정도가 거론된다. 단체협약에 따라 노조로부터 사실상 허락을 구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예고된다.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노조 주장대로 미국에 전기차 투자를 확대하거나 앞당기거나 모두 국내 일자리 축소와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때문에 발끈한 정부가 지금은 힘을 실어주지만 일자리 축소에 있어서도 한목소리를 내줄지는 또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