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50조+α’ 안정책에도…기관 투매(投賣) 공포 여전한 채권시장
입력 2022.10.25 07:00
    레고랜드發 충격파에 채권시장 불안감 최고조
    정부 50조 유동성 대책에 시장은 '일시적' 안도
    근 한달 방치해 사태 키워, 대책 실효성도 의문
    "이 참에 팔고 떠나자"…어수선한 분위기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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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가 촉발한 채권 시장의 자금 경색이 심화하자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긴급 대책을 내놨다. 최악의 사태는 피하게 됐지만 정부의 개입이 늦었다거나, 별다른 실효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있다. 최근까지 유동성 확보가 급한 기관들이 채권을 싸게 급처분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앞으로 막바지 투매 행보가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지난주까지 채권 시장은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레고랜드 채무불이행 문제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시장의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건설사와 부동산금융 부문의 연쇄 부도 가능성이 제기됐고, 회사채 투자 수요도 식었다. 싼 값에 나온 우량채도 팔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주 한 지방자치단체 공기업은 1년 만기 500억원 규모 채권 발행을 추진하면서 5% 미만이던 민평금리에 100bp(1bp=0.01%포인트) 이상의 추가 금리를 얹었다. 수요가 마땅치 않자 몇 분 사이 금리를 더 올리기도 했다. 지자체 관련 채권의 위험성이 드러난 터라 발행이 쉽지 않았다.

      한 금융지주계 카드사 채권은 5% 중반대의 민평금리에 70bp를 가산해 매물로 나왔다. 그러나 시장에선 그보다 수십bp 높은 금리를 바랐고 거래가 무산됐다. 다른 금융지주계 캐피탈사 채권은 민평금리에 100bp를, 대기업 계열 캐피탈사 채권은 90bp를 얹어준 후에야 투자자를 찾았다.

      자금 사정이 급한 여전사가 아니라 대기업 계열 제조사들도 가산금리의 덫을 피하기 어려웠다. 신용등급 AA급인 한 대형 제조사의 채권은 민평금리 대비 55bp, 또 다른 제조사의 채권은 50bp의 금리를 얹어 매물로 나왔다. 재무여력이 탄탄한 우량 대기업들로 예전 같으면 마이너스 프리미엄을 얹어서 샀어야 했을 채권이다.

      그만큼 시장에선 채권투자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주요 금융사나 공제회·연기금 등 투자자들이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싼 값에 채권을 던지면서 시장의 불안감을 더 키웠다는 평가다.

      정부는 지난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어 회사채 및 단기 자금시장 동향을 점검하고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 20조원,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16조원 등 총 50조원+α 규모다. 시장은 일단 안도했다. 24일 각 만기별 국채 금리는 직전 거래일보다 3~5%가량 하락했다. 미국에서 기준금리 인상 속도 조절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채권 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레고랜드 사태가 건설사와 부동산금융에서의 연쇄 부도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정부의 대응이 아쉽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눈에 보이는 위험을 한달 가까이 방치하면서 대응이 늦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부도가 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기 전이었으면 50조원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정부 유동성 프로그램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 정부가 유동성 대응에 나설 때는 기준금리도 내리는 상황이었다. 시장에 유동성이 풀리는 상황에 정부도 뒤를 받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유동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무 대응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50조원이 주는 무게만큼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책금융기관이 회사채 시장 지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채권을 찍는다면 시장에 또 한번 충격파가 미칠 수 있다. 산금채 등에 자금이 우선 몰리면 돈이 필요한 곳들의 조달 금리는 더 올라간다. 지난 7월 정부가 회사채·기업어음(CP) 시장 안정 방안을 내놓을 때만 해도 ‘회사채 상환 자금이 늘고 있어 큰 문제가 없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들이 회사채를 상환하기 여의치 않은 데다, 지원 규모까지 크게 확대된 상황이다.

      채권투자자들은 국가가 나서 채권을 사주겠다고 하는 지금 상황을 ‘마지막으로 발을 뺄 기회’로 여길 수도 있다. 지금의 안정세가 일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모르고, 당분간은 금리 인상 압박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주에도 채권 시장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채권 발행에 나선 한 공기업은 2년물 회사채 수요 모집에 실패했고, 5년물은 개별민평에 43bp를 가산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광역자치단체 공기업은 개별민평에 120bp를 얹어줬고, 한 준정부기관은 정부 보증에 더해 가산금리 20bp를 주고야 투자 수요를 찾을 수 있었다.

      한 채권투자업계 관계자는 “정부 대책에 미국발 금리 인상 속도 조절론까지 더해지면서 채권시장이 잠시 안도하는 분위기”라면서도 “그나마 수요가 생기고 금리도 낮아지는 것 같을 때에 크레딧채권을 팔고 떠나자는 기관들의 인식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