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전실 시스템' 겨냥할 이사 충실의무 개정…정부는 진짜 의지가 있을까?
입력 2024.06.18 07:00
    취재노트
    이사 책임 주주로 넓히잔 건데…재계는 당연히 반발中
    기저엔 망가진 미전실 시스템…연금도 해외 이탈 고민
    3세 경영 부작용 본격화…현 거버넌스로 경쟁 버텨낼까
    재계 반발에 포이즌필, 배임죄 폐지 등 당근 꺼내드는데
    여소야대 장기화에 기업 대립 부담…의지·능력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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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사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아귀다툼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상법에선 이사가 회사 최선의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이 책임 범위를 주주로 넓히자는 게 쟁점인데 이미 재계 반발이 거세다.

      정부가 당초 입장을 뒤집고 이사 책임 확대에 힘을 싣기 시작했으나 여소야대가 길어지는 국면에서 기업과 대립하기엔 부담이 적지 않다.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한발 물러나 당근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취지에 공감하는 측에서도 정부가 진정성 있게 상법 개정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현재 이사 책임 확대 문제를 소액주주 보호 문제로만 접근하면 재계와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우선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야당 외 금융당국을 시작으로 정부까지 이사 책임 강화 목소리를 높이는 배경부터 따져봐야 한다. 

      지난달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논의한 '2025~2029년 중기자산배분' 안건에선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공유됐다. 자산별 최적 투자 비율을 내부적으로 검토해 보니 국내 증시엔 한 푼도 넣기 어렵겠다는 결론이 섰다는 얘기다. 실제로 투자 업계에선 지난 10년 국내 상장 대기업 중 신사업을 성공시켰거나 본업 경쟁력을 강화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단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미 증시 자금 상당수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중이다. 

      더 깊게 들어가면 국내 대기업 성장사의 일익을 담당해온 '미래전략실' 시스템이 망가지고 있다는 진단이 자리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상법에서 규정한 대로 주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사회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강력한 의사결정권을 지닌 오너 중심으로 전략실, 기획실과 같은 조직이 초법적 권한을 행사해 왔다. 각사마다 형태나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대기업들이 암묵적으로 오너를 받드는 미전실 식 의사결정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게 시장에 통할 때는 이사회가 회사에 충성하건, 주주에 충성하건, 오너에 충성하건 사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회사 이익은 궁극적으로 주주에 귀속된다. 직접 회사를 일으켰거나 물려받은 창업자 자녀 역시 회사가 잘돼야 한다. 상속·승계와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는 대체로 이들 사이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 회사도 여럿 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속·승계를 몇 순배 거치며 오너 3~4세 시대에 들어서자 이 같은 선순환이 깨지고 있다는 분석이 늘었다. 여전히 오너 입김은 강력하고 수많은 미전실들이 그룹사 전반을 관리하고 있지만 마땅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주주 전체에 귀속될 이익을 부당하게 취하는 오너뿐 아니라 능력, 자질이 부족하면서도 선대 수준 강력한 결정권만 유지하는 오너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는 얘기다.  

      지금 국내 대기업 거버넌스로 향후 10년을 버틸 수 있느냐로 초점을 바꾸면 이사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만하다. 연초만 해도 정부는 야당의 상법 개정안에 "추상적이고 선언적 규정에 그친다"라는 지적을 내놨으나 최근 입장을 뒤집고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 축소 논의를 지켜본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정부 입장 변화가 단순히 정무적 판단 때문은 아닐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사모펀드(PEF) 운용사 한 관계자는 "사실 그동안 대기업 거래는 계열사의 경우에도 지주 전략실, 기획실과 협의하고 오너 재가를 받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이게 강점으로 작용하던 시기가 지나고 있는 것 같다"라며 "오너가 결정을 내려주지 못하니 경영진이 요지부동일 때도 많고, 과거처럼 신속하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오너들이 사고 내는 사례도 너무 늘었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지금 야당이나 정부가 제기하는 이사 책임 범위 확대는 기업 의사결정 구조에서 오너 영향력을 줄여나가겠다는 논의로 풀이된다. 이사 입장에선 주주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가 민사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오너 독단을 견제하는 방어수단이 될 수 있다. 달리 보자면 해외 상장사처럼 이사회 내에 오너가 아니어도 능력 있는 경영진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을 늘려나간다는 얘기가 된다.

      운용업계 다른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서 전문경영인 풀을 갖춰보려 해도 큰 의미가 없었던 게, 이를 수용할 만한 거버넌스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대기업 이사회 내 실질적인 룸이 없다는 문제부터 해소하지 않으면 어떤 경영진을 앉혀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대기업들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정부가 진짜로 그만한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오너와 미전실 시스템은 정부가 사기업을 동원하는 창구로도 기능해 왔다. 당장 재계 반발이 거세자 정부당국 측에서도 이사 책임을 확대하되 포이즌 필이나 특별배임죄 폐지 등 당근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지난 총선거 참패로 여소야대가 이어지는 상황이라 정부 역시 기업과 대립하는 데 따른 부담이 적지 않은 탓으로 풀이된다. 

      취지대로 이사 책임을 강화해 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까지 나아가자면 과도한 상속세제 등 다른 확실한 유인책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여기서부턴 사회·정치적인 반발이 가세할 텐데, 현 정부가 이를 감내할 수 있을지 우려도 크다. 당장 해외 기업들과 직접 비길 수 있을 만한 인재풀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오너 독단을 겨냥할 수단만 주는 건 아닌지도 따져봐야 한다. 

      언젠가는 손을 봐야 하는 문제지만 정부가 섣불리 끄집어냈다가 흐지부지될 경우 안 좋은 선례만 남길 수 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연금 수탁자책임실 출신 한 관계자는 "일본을 벤치마킹한 밸류업 프로그램은 물론 얘기를 꺼내다 만 상속세 개편 문제까지 정부가 정공법을 피하면서 논의가 산으로 가는 분위기"라며 "이번 이사 책임 확대 논의도 취지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흐지부지될까 우려가 크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