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사다리 무너진 PEF 생태계…어려워진 '루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입력 2024.06.19 07:00
    자취 감춘 기관들의 '루키리그' 출자
    기관투자자들 대형사 선호 경향 심화탓
    방폐기금 이어 공무원연금도 대형사 '독식' 구도
    연기금·공제회 감사 앞두고 프로젝트 출자도 '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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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신생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는 형국이다. 기관투자가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안전한 투자, 즉  대형 운용사 선호 기조가 올해 들어 더욱 심화하고 있다. 대형 운용사들은 펀드레이징 '한파'가 불어닥친 해외기관 대신 국내로 발길을 돌렸는데 기존엔 참여하지 않았던 소형 규모의 블라인드펀드 출자 사업에까지 도전장을 내미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보수적 기조가 강해진 기관투자가와 한국으로 돌아온 대형사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PEF 생태계의 오랜 화두였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단 평가가 나온다.

      올해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블라인드펀드 출자사업에서 루키리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2022년까지만 하더라도 교직원공제회와 노란우산공제, 군인공제회 등이 루키리그를 운영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난해 루키리그 출자사업을 진행한 기관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유일했다.

      LP들이 루키리그 출자를 망설이는 표면적인 원인은 '매칭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캐피탈사를 비롯한 주요 금융기관들 사이에선 위험가중자산(RWA) 관리를 위해 에쿼티 출자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중소형 운용사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던 저축은행은 치솟는 연체율로 인해 부실채권 관리가 눈앞에 닥친 과제다. 실제로 외부 출자여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단 평가다.

      과거 루키리그를 운영했던 한 기관투자자 관계자는 "루키리그에 출자를 한다 하더라도 지금 시기에 신생 PE가 기한 내 '매칭'을 완료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며 "이러한 리스크를 안고 루키리그를 운영할 수는 없기에 향후 금리가 낮아지고 시장에 유동성이 좀 더 풍부해지면 재개를 고려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관투자가들에도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국내 기관들 사이에선 해외 부동산 투자 손실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잠재 뇌관'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수익을 가져다 줄 투자처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대체투자분야중에서도 PEF출자에 기대를 걸어볼만 하지만 불확실한 펀드 결성 여부가 변수다. 이 때문에 투자와 회수 이력이 미미한 중소운용사에 자금을 맡길 유인이 떨어진단 지적이 나온다.

      국내 기관투자가 한 관계자는 "PEF 생태계 측면에서 루키리그를 운영하는 것이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만 이것은 기관에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풀어야할 일"이라며 "어쨌거나 수익성이 가장 중요한 기관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담보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운용사 위주로 선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현상은 올해 기관들의 출자 계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국민연금은 출자액이 하우스별 전체 펀드 결성액 가운데 35%를 넘어설 수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방폐기금 역시 펀드 결성 총액의 30% 이상을 타 LP로부터 출자 확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공제회 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기관들도 지금 시장에서 매칭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운용사 선정을 완료한 뒤 기한 내 매칭을 못해 GP 자격을 포기라도 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어느정도 자금을 확보한 운용사를 선정하기 위해 이런 조건들을 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와 루키의 경계가 사라진다면, 펀드레이징은 역시 투자경험이 풍부하고 오랜기간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온 대형사들이 강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때마침 해외 연기금들 역시 상업용 부동산 손실이 커지며 금고를 걸어 잠그는 상황이 장기화하는 추세다. 최근엔 MBK파트너스 등 초대형 PE들이 국내 중소형 출자사업에 등장했다. 수 조원 규모의 블라인드펀드를 운용하는 MBK파트너스가 250억원을 출자 받기 위해 컨테스트에 뛰어드는 현재 상황은 분명 중·소형 PE들엔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투자 규모와 이력, 회수 등 정량적 평가에서 중견 PE들이 이들과 경쟁해 승기를 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른 공제회 한 관계자는 "현재 해외 연기금이 상업용 부동산 손실로 지갑을 닫고 있기 때문에 해외 운용사들도 한국 기관으로부터 출자 받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사실 소형·신생 운용사들의 투자의 대부분은 프로젝트펀드로부터 시작한다. 중소형 운용사들은 과거 MG새마을금고로부터 자금을 받아 운용한 곳이 상당수다. 그러나 지난해 MG새마을금고의 출자 비위가 불거진 이후 새마을금고는 물론 기관투자가들의 프로젝트펀드 출자가 급감하는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국정감사와 감사원 감사 등에서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란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연기금, 공제회들은 최근 감사를 받았거나 곧 감사를 앞두고 있다. 감사원은 최근 공제회를 대상으로 대체투자 실지감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위탁운용사 선정 기준 등을 들여다본 것으로 전해진다. 연기금은 오는 10월 감사원의 기관 정기감사도 앞두고 있다. 감사를 끝낸 공제회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22대 국회 개원 후 첫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는 탓이다. 통상 신규 국회 개원 후 첫 국감은 의원실의 자료 요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기금 한 관계자는 "올해는 다른 해보다 기관 평가와 감사 이슈가 많아 긴장감이 높은 상황"이라며 "평소보다 출자사업을 공고하고 운용사를 선정하는 데 더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사'에 대한 부담은 기관투자가들이 정량적 평가 요소가 확실한 대형 하우스를 선정하는 것이 향후 문제 소지가 적다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위탁운용사 선정 과정에 대한 기록만 제대로 남기면 큰 문제가 없는 블라인드펀드와 달리 프로젝트펀드는 손실이 발생하면 기관이 짊어져야 할 책임 소지가 더 크다. 이왕이면 프로젝트펀드 대신 블라인드펀드, 중소형사 대신 대형사를 선호하는 기관투자가들의 기조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단 평가도 나온다.

      기관투자가 한 관계자는 "블라인드펀드의 경우 운용사 선정 절차만 제대로 갖추고, 운용사가 제출한 정량 자료만 제대로 보관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며 “출자사업에 대형사들이 지원해주면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대형 하우스들은 정량 요소가 탄탄하고 설사 일부 펀드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책 잡힐 일이 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